허리가 좋지 않다. 일상은 무너졌고 삶의 질은 추락했다.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간절한 염원이 되었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이동의 범위다. 걸을 수 있는 거리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집에서 도서관까지 갔다 오던 것이 전철역까지로, 다시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으로 향하는 얼마 안 되는 거리조차 조심스럽다. 반대로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은 길어졌다.
좁은 아파트, 더 좁은 침대 위. 나는 갇힌 자다.
창밖은 완연한 봄이다. 산에는 생강나무 꽃이 노랗게 터졌을 테고, 진달래는 아스라이 피었다. 산벚꽃이 한창 피어나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흩날린다. 나는 문득 자문한다. ‘나는 유폐된 것인가?’ 신체의 자유를 저당 잡힌 채 정해진 공간에 머무는 기분은 때로 나를 깊은 우울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가만히 누워 사유의 끝을 쫓다 보면, 지금 나의 상태를 ‘구속’이라 정의하는 것에는 분명한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이 고립에는 주체적 주도권이 있다. 질병이 움직임을 제한했을지언정, 나의 존엄과 선택까지 가두지는 못했다. 움직일 수 없는 대신 나는 선택할 수 있고, 선택은 곧 자유다. 술을 마실지 혹은 직접 빚을지 결정하는 것, 요리를 만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거나 화분을 가꾸는 행위는 모두 내가 선택한 나의 시간이다. 나는 강제된 수감자가 아니라, 잠시 멈춰 선 비자발적 고립의 상태에 있을 뿐이다.
나아가 나는 미디어와 인터넷이라는 창을 통해 물리적 한계를 가뿐히 넘어선다. 손가락 끝으로 나를 세상에 표출하고, 타인의 사유를 선별한다. 몸은 침대에 묶여 있으나 정신은 전 세계를 유람하며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연결을 지속한다. 물리적 이동의 제약이 곧 존재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자유의 정점은 매일 밤 찾아오는 안식이다. 담장과 철창이 가로막는 단절된 공간과 달리, 나에게는 온기가 머무는 집이 있다. 저녁 무렵 딸아이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오면, 이 좁은 아파트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안식처가 된다. 한 공간 안에서 함께 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을 받는다.
결국 자유란 공간의 넓이나 신체의 가동 범위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상황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좁은 방은 감옥이 되기도 하고 무한한 사유의 광장이 되기도 한다. 신체적 자유는 잠시 질병에 빌려주었을 뿐, 내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가치들은 여전히 내 손안에 온전하다.
아! 나는 여전히, 자유롭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