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아래 산다.
서울 하늘 아래 머물고 있지만, 나는 스스로 이곳을 시골이라 부른다. 요즘의 수락산 계곡에서는 밤마다 도롱뇽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산등성이에는 어느덧 진달래와 생강나무 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몸소 느끼며 살다 보면, 우리 곁에 피어난 풀과 나무의 이름 하나에도 예사롭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말 속에는 세상을 바라보던 선조들의 정직한 시선과 지혜가 켜켜이 쌓여 있다. 특히 사물의 이름 앞에 붙는 접두사 ‘참’과 ‘개’는 단순히 생물의 종류를 나누는 기호를 넘어, 대상에 대한 가치 판단과 실용성을 결정짓는 매우 흥미로운 언어적 장치다. 무엇이 우리 삶에 이롭고 진실한지를 가늠하던 이 잣대를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우리가 잊고 지낸 본질적인 가치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많은 이들이 접두사 ‘개-’를 동물인 개(Dog)와 연관 짓기도 하지만, 식물이나 사물 이름에 붙는 ‘개-’는 동물과는 전혀 다른 어원을 가진다. 이는 가짜이거나 품질이 낮은, 혹은 야생의 의미를 더하는 우리말 특유의 표현 방식이다. 흔하게 피어 식용이나 약용으로 귀하게 대접받지 못한 ‘개나리’나, 정식으로 빚은 떡이 아니라 찌꺼기로 대충 만든 ‘개떡’이 그러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충직한 벗인 개(Dog)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할 법한 일이다. 제 이름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부족하고 가짜인 것’들의 머릿기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어의 역사에서 이 ‘개’는 동물을 비하하려는 의도보다는, 본래의 것에서 빗겨 나간 야생의 상태를 지칭하려던 고어에서 비롯되었다.
과거 조상들은 자연물 중에서 인간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것에 ‘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산천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진달래는 예부터 ‘참꽃’이라 불렸다.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하게 피어나 우리에게 가장 먼저 봄을 알리던 이 꽃은, 배고픈 시절 화전을 부치고 술을 담가 허기를 달래주던 고마운 구황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민물 게 중 가장 맛있고 귀했던 것은 ‘참게’가 되었고, 땔감부터 가구와 도토리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던 나무는 ‘참나무’가 되었다.
반면, 겉모양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 써먹으려 하면 맛이 없거나 독이 있는 것들에는 ‘개’를 붙여 가치를 낮게 평가하거나 주의를 주었다. 진달래와 비슷하나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는 철쭉은 ‘개꽃’이 되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민물 게 중 참게보다 맛이 떨어지거나 하급으로 취급되는 게를 ‘개게’라 부르기도 했다. 참기름을 짜는 귀한 식재료인 ‘참깨’에 대비하여 상대적으로 흔한 들깨나 야생 깨를 ‘개깨’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참’과 ‘개’의 대립 구조는 인간의 생활에 얼마나 이로운가를 기준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구분은 동식물을 넘어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을 드러내는 대목에서도 흥미롭게 쓰인다. 겉모양은 살구와 비슷해도 맛이 시고 떫어 먹지 못하는 ‘개살구’는 판소리 춘향가에서 지극히 선정적인 비유로 등장한다. 이도령이 춘향을 희롱하며 던지는 사설 중 “시금털털 개살구 작은 이도령 서는 데 먹으려느냐”라는 대목은 파격적이다. 여기서 ‘서는 데 먹으려느냐’는 표현은 남성의 발기와 노골적인 성적 은유를 통해, 점잖은 양반 도령의 가면을 벗어던진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드러낸다.
과거 일부 지식인들은 이러한 대목을 두고 『춘향전』이 지나치게 음란하고 통속적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통속성은 오히려 작품의 강력한 생명력으로 평가받는다. 관념적인 도덕책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본능인 성욕을 정직하게 드러냈기에 시대를 초월한 공감을 얻은 것이다. 비극적일 수 있는 긴장 상태를 ‘개살구’ 같은 비유로 치환하여 웃음으로 승화시킨 해학의 힘은, 이 작품을 단순한 연애 소설 이상의 걸작으로 만들었 다. 결국 가장 통속적인 소재를 통해 가장 숭고한 사랑과 저항의 가치를 이끌어낸 ‘통속의 미학’이야말로 『춘향전』의 진가인 셈이다.
하지만 ‘개’라는 글자가 언제나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의 강인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산기슭의 ‘개복숭아’는 매끈한 재배 복숭아보다 볼품없으나 그 투박함 속에 깊은 약효를 품고 있다. 먹을 수 없는 ‘개머루’ 또한 자연의 섭리 안에서는 엄연한 생태계의 일원이다. 결국 ‘참’과 ‘개’를 나누는 것은 사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과 쓰임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름 뒤에 숨겨진 사연을 되새기다 보면 오늘날 우리가 매달리는 가치들을 돌아보게 된다. 화려한 수식어와 겉포장에 파묻혀 실질적인 가치가 없는 명성에 집착하며, 정작 내면을 채우는 ‘참’의 가치는 소홀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지금 곁에 둔 것들 중 진짜 마음을 다해 ‘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은 속일 수 있어도 본질은 숨길 수 없다. 시금털털한 개살구보다는 맛이 꽉 찬 참새 한 마리가, 독 있는 개꽃보다는 소박한 화전 한 점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수만 가지 수식어보다 ‘참’이라는 한 글자가 주는 묵직한 진심을 기억해야 한다. 오래된 이름들이 나직이 들려주는 이 깨달음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판별하는 맑은 거울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래도 봄의 개나리는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