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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김나영 Apr 27. 2021

34 < 기다림과 믿음 >

기다림이라는 것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나는 기다림과 믿음을 하나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에는 언젠가는 기다리던 그가 반드시 올 거라는 굳은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광야에서 구세주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구세주가 꼭 오실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기다림에도 요령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바라고 기다릴 때, 너무 애타게 기다리면 쉽게 지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하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뻔한 것을 조급함 때문에 기다림을 일찍 멈추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느긋하되 간절하며 은근한 끈기를 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제대로 잘 기다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맡기게 되었을 때에도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준다면 그에게서 원하던 것 이상의 것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를 믿어줌으로 해서 그가 더욱 분발할 수 있는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믿고 기다릴 때 우리의 마음에도 평화가 머물 수 있습니다. 불신과 조급함으로 마음의 평화를 깨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도, 너무 조급하게 성과를 바라며 부담을 주는 믿음이 아니라 언젠가는 해내고야 말 것이라는 느긋한 기다림의 믿음이 되어야 하며, 그것을 다시 말하면, 기다리되 믿음을 갖고 기다리라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담이 될 정도로 너무나 큰 기대와 믿음은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마침내 히딩크 감독을 떠나보내게도 만든 것처럼 완전히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나 어린 제자들에게도 참으로 오랫동안 묵묵히 기다려 주어야 하며 끝까지 믿어 주어야 하는데, 부모들이 되면 다들 그렇게 자녀들에 대해서 조급증을 갖게 되는가 싶어 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어린아이의 싹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으려면 곁에서 바람이나 막아주며 그저 오랜 세월을 믿음으로 기다려주어야 하는데, 빨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라고 마구 흔들어 대서 결국 뿌리째 뽑아버리고 마는 어리석은 부모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선생님에게 아이를 맡겼으면 그 선생님을 끝까지 믿어주고 선생님의 소신이 아이들에게 펼쳐질 때까지의 시간을 기다려 주어야 하는데 아이의 부족함이나 부모 자신의 조급증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며 귀가 얇아집니다. 특히 예능 교육은 시간이 많이 흘러야 어떤 그림과 모양이 겨우 완성되는 것인데, 자신들도 그렇게 못했으면서 자식과 선생에게만 졸라 대기 일쑤입니다. 또한 선생님을 너무 자주 바꾸어 버림으로 해서 시간이 더욱 지체되고 오히려 훨씬 뒤처지거나 결국에는 죽도 밥도 아닌 것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부모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백 년 지 대계(百年 之 大計)가 되어야 할 교육행정이 자꾸만 바뀌는 것도 기다릴 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행되고 성과가 있기까지 걸려야 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애써 줄을 타고 올라가다가 거의 다 올라가서 그만 줄을 놓아버리는 것과 같은 결론이 나고 맙니다.


자신에게 어떤 변화된 모습을 추구하고 있었다면 자신에게도 믿음과 기다림을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파워(power) 있는 에너지가 발산되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성과를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조급함이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기다림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어떤 것에 대해 오랜 믿음을 간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패스트푸드점이 많아지고 퀵 서비스가 각광받고 있는 바쁜 사회의 시대적 흐름 때문인지 덜 바쁜 사람마저도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기다림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산 가는 기차가 빨리 오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반대 방향인 서울행 기차를 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게 살아가야 할지라도 마음만은 조급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빨리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는 바깥세상의 겉모습만 대강 스치듯 보게 될 뿐입니다. 완행열차를 탄 것처럼, 목적지를 향해 느릿느릿 달리는 동안의 시간을 기다리기도 하고, 간혹, 특급 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몇 번을 연착을 해야 할 지라도 그 기차가 끝내는 목적지에 이르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편안히 그 기다림의 시간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애써서 보려 하지 않아도 주위의 모든 것이 자세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이는, 그런 완행열차와 같은 삶의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이런저런 구경거리로 재미도 느끼고, 그렇게 즐겁게 가다 보면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부침을 요리할 때조차도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너무 자주 뒤집어 대서 덜 맛있고 모양도 흐트러진 부침을 만듭니다.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는데 더 빨리 돌아가라고 쾌속 회전 엔진을 달아 놓는다고 해서 더 빠르게 도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과 인간사의 순리적 흐름에는 꼭 걸려야 하는 절대적 소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혜롭게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급하게 바꾸려 한다면 그것 또한 순리에 역행하는 것이 됩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늦었다고 자신이 덩달아 뛴다고 해도 버스의 속력이 더 빨라지지 않습니다. 제한 속도를 지키고 있는 버스 기사에게 협박하듯 조르다가 자신의 요구 사항이 들어지지 않는다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에서 뛰어내려 본들 자기 자신만 손해입니다.

길을 건너려는 달팽이의 느릿한 걸음조차도, 우리에게 달팽이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숭고한 뜻이 있다면 우리는 자동차를 세우고 기다려야 합니다. 지루할 만큼 긴 시간이 될 지라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기다림은 우리 자신에게도 주는 것이 많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또 그 무엇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인내와 끈기를 배우게 됩니다.

여유롭게 기다리는 가운데 보다 멋진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기다림을 즐길 줄 아는 자신의 넉넉하고 멋들어진 모습도 발견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믿어주고 믿음을 받는 마음의 교류를 통해 서로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기다려지는 사람과 일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삶의 이유를 그곳에 두고라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힘겨움 속에서도 웃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에는 더욱더 믿음을 가지고 조용히 기다려 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조르며 보채기만 한다면 그는 멀리 달아나고 싶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냥 곁에서 혹은 멀리서 그(그녀)를 말없이 지켜보며 미소 지으면,

속 깊게 자신을 기다려 주는 그 마음이 저절로 전해지고 그런 데서 더욱 큰 사랑이 확고하게 자리하게 된 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십시오.

서로에게서 결코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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