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private stor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Oct 13. 2016

엄마의 탕탕탕

"아얏!"

 방심하던 사이 손을 베였다. 선홍빛 피가 스멀스멀 베어나온다. 멍하니 그 붉음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른 손으로 상처 부위를 꾸욱 눌렀다. 상처부위가 따끔따끔해져 왔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칼질이 서투르다. 언제쯤이면 엄마처럼 "탕탕탕"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칼질을 할 수 있게 될까.


 처음부터 칼질을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엄마도 가끔씩 손가락을 베었던 것 같다. 어느 평범한 저녁에, 엄마는 여느 때와 같이 식사 준비를 하고 나는 티비를 보고 있었다. 부엌에서 들린 "아얏"소리에 부리나케 뛰어가보니,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칼질을 하고 있었다.

"엄마 손 베인거 아니야?"

"아니야 안 베었어. 곧 있으면 저녁 다 되니까 가서 티비 보고 있어."

 무심코 거실로 돌아가려다가 엄마의 손가락에 서린 선홍빛 핏방울을 보아버렸다.

"엄마 손 베인거 맞잖아! 약 발라야지 계속 요리하고 있으면 어떡해"

"아니야 베인건 아니고 그냥 살짝 스친거야. 아무 것도 아니니까 얼른 들어가서 티비보고 있어. 저녁 다 되면 부를게."

  나는 이내 별 일 없었다는 듯 거실로 돌아가 티비를 보았다. 엄마의 선홍빛 손가락은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엄마에게는 저녁이 늦어져 내가 배고프게 되는 것이 더 중요했고, 나에게는 방해받지 않고 계속 티비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이 중요했다.


 머릿속에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한 달 전쯤, 엄마가 미국 내 집에 방문했다. 평소보다 더 깨끗하게 치우고 준비했건만, 엄마 눈에는 아직도 챙겨주어야 할 "딸아이"로 보이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 마자 청소를 하시고, 냉장고를 한 번 살펴보시더니 이내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엄마는 몇 번이나 와 봤던 나보다 더 익숙한 모습으로 마트를 누볐다. 내가 아무리 여기는 미국 마트라 그런 거 없다고 해도, 엄마는 이내 그것 또는 그 비슷한 재료를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었다. 트렁크 한가득 음식을 실어 집으로 와서도, 엄마는 내 집 부엌이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듯이 자연스레 부엌으로 향했다. 내가 하겠다고, 엄마를 말려도 엄마는 나를 돌려보내며 또 내게 말했다.

"피곤할텐데 티비 보고 있어. 엄마가 하면 돼."


 좁은 주방에 엄마 옆에 알짱이는 것이 오히려 더 엄마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것 같아 얌전히 쇼파에 앉았다. 예의 그 "탕탕탕" 소리가 났다. 이내 밥 냄새가 그윽하게 집 전체에 퍼졌고, 엄마의 칼질 소리는 악기소리처럼 리드미컬하고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마치 엄마가 마법을 부려서, 조리도구들이 사람이 되어 짝을 지어 춤을 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엄마가 만들어낸 밥은, 매일 먹던 그 "집 밥" 이었다. 그립고, 따뜻하고, 어느 한국 음식점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그런 맛. 아, 그렇구나. 집 밥은 조미료나 재료의 맛이 아니었구나. 집 밥에는 엄마의 "탕탕탕"과 엄마의 냄새, 잔소리가 꼭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아무리 엄마가 이걸 넣어라, 저걸 넣어라 알려주어도 내가 만든 밥이 엄마의 집 밥 맛이 나지 않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나보다.


 옛날 어른들이 그렇듯, 엄마는 20대 중반에 시집을 오셨고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릴 때에 나를 낳았다.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던 것 같지만, 그 때의 엄마는 칼질이 서툰 나 같은 젊은 아가씨였을 것이다. 나를 위해, 아빠를 위해, 가족을 위해 수없이 저녁을 준비하고 손가락을 베어가며 엄마의 그 "탕탕탕"을 완성시켰으리라. 그 소리는 내가 어줍잖게 손가락 몇 번 베었다고 따라갈 수 있는 경지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손가락을 쳐다보니 어느새 피는 멎고 손톱 아래로 빠알간 살이 드러나 있었다. 순간 너무도 허기가 졌다. 엄마의 밥이 먹고싶어졌다.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보고싶은 우리딸~ 잘 지내고 있지?"

엄마의 상기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럼 누구딸인데~ 우리 엄마딸인데."

라고 능청스레 대꾸하자 엄마가 호호호 하며 웃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아빠가 있지.... 그리고 그 옆집 아저씨가 말이야...."

내용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엄마의 홍알홍알 소리가 듣기 좋아 가만히 귀를 대고 "응, 응" 맞창구치고 있었다. 마치 부엌에서 다시 엄마의 탕탕탕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집 안에 엄마의 냄새가 그득해졌다.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칼을 잡고, 요리를 했다. 완성된 음식에서는 어쩐지 엄마의 집 밥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숟가락 사이로 보이는 묘한 손톱 모양과 빠알간 속살이, 처연하기보다는 익살맞아 보이기 시작했다. 언젠간 나도 엄마의 "탕탕탕" 소리를 낼 수 있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밥 한공기가 쓱 사라졌다. 근래들어 먹은 밥 중에 가장 맛있는 한 끼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