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에 의하면 요즘 아이들의 언어능력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다고들 한다. 미디어 노출로 책 읽는 시간이 적어졌다거나, AI에 의존하게 되면서 스스로 작문을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중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학부모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등교육으로 갈수록 국어영역 점수의 편차가 커진다고 하고, 수능을 잘 보려면 독해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때문에 초등학생 때부터 논술학원에 다녀야 하고, 국어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나이가 더 어린 유치원 때에는 영유(영어유치원)를 통해 영어를 끝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소위 잘나가는 엄마들의 교육대계획이다. 한국의 영유는 나름대로 체계적이어서(?) 오히려 문법이나 독해 영역에 있어서는 미국에 있는 일반적 유치원보다 아웃풋이 낫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오히려 미국에서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보다 한국에서 영유를 다닌 아이들이 영어 동화책도 더 잘 읽고, 스펠링도 더 잘 쓴다는 것이다.(미국에 거주하다가 방학 때 잠시 한국에 온 아이들이 한국 영유에 단기간 등록해 파닉스를 배우고 돌아간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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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수 국내파이지만 영어가 어렵지 않았다. 수능영어는 너무도 쉬웠고, 대학원을 위해 토플을 쳤을 때도 단기간에 어렵지 않게 점수를 만들 수 있었다. 토익은 거의 만점에 가깝게 나왔고, 한국에서 '시험으로서의 영어'에 불편함을 느껴본 적은 별로 없다.
하지만 미국에 가자 얘기가 달라졌다. 20대 후반 뒤늦게 오른 미국 로스쿨 유학길은 쉽지 않았다. 하버드, 시카고, 유펜 등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자유자재로 영어를 쓰는 친구들 사이에서 분투하면서 영어에 대한 갈망과 원망이 함께 생겼다. 수학이나 공학같은 분야라면 덜했겠지만, 법학은 '언어능력'으로 타인과 경쟁해야 하는 학문이었으므로 영어가 부족한 내게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어딜 가서 공부로 뒤져본 적이 없었지만, 미국에서는 교수님께 이름이 불렸다가 대답을 제대로 못할까봐 두려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런 경험을 거치면서 내 아이는 당연히 영유에 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나에게 있어 영어는 다른 계획적인 엄마들처럼 수능을 위한 영어점수를 미리 만들어 놓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 아이는 영어 '과목'이 아닌 '언어'로써의 영어 그 자체를 배우기를 원했다. 언어는 단순히 생각을 전달하는 역할을 넘어,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결정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안에 녹아든 문화, 사고방식을 통째로 흡수하는 것이다. 한국 교육만으로도 얼마든지 학문으로서의 영어를 배울 수는 있지만, 이미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여 굳어진 사고에 영어를 덧씌우는 것은 곱절의 노력을 요하는 일이기에 처음부터 영어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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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는 보편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한국에서 계속 자라고 한국 대학을 다닐 아이라면 수능점수 정도를 위해서 굳이 영유를 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유를 다니지 않아도 초등학교 이후의 교육만으로도 영어 공부 시간은 차고 넘친다. 7세 고시니, 4세 고시니 해가며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아도 수능 영어를 만점맞을 정도의 영어 실력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간혹 발음 때문에 영유에 보낸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발음과는 무관하다. 미국식 발음이 우리에겐 익숙하고 더 편안하게 들릴 수는 있으나,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미국식 발음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절한 단어와 문구를 상황과 수준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결국 영유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발음이나 파닉스 같은 것들이 아닌, 영어와 부딪쳐야만 하는 환경 그 자체이다. 따라서 영유의 효용가치를 가장 극대화하여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영어를 '잘 해야 하는 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삶과 영어를 분리할 수 없는 환경을 가진 아이이다. 몇 년간이라도 해외에서 체류하게 될 예정이라든가, 국제학교를 다니고 미국에서 대학을 가려는 아이들 말이다.
영유를 보내야만 하는가. 물론 각 가정이 처한 입장과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당장 해외체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영어를 언어로써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영유는 나름의 가성비있는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자녀를 영유에 보낼지 고민하고 있는 부모라면, 영유를 통해 자녀에게 주고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한층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