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외딴섬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이니.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은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다.
한 곶(岬)이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고,
그대의 친구나 그대의 영토가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그만큼 나를 줄어들게 한다.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by 존 던
누구도 외딴섬은 아니다.
공영방송, 종편, 인터넷 언론, 유사언론, SNS, 커뮤니티, 모바일 채팅방, 유튜브 등 너나 할 것 없이 ‘공포탄 쏘아 올리기’의 연속이었다. 두려움을 부추기며 '심리적 2차 감염'을 퍼트리는 책임감 부재의 콘텐츠들은 사람들에게 기생충처럼 파고들었다. 누군가는 집 안에 하루 종일 있었음에도 상상 속 바이러스에 겁먹어 시름시름 앓는 모양새였다. ‘아이가 걱정되어서, 가족이 걱정되어서’로 시작되는 말 안에는 확인이 불분명한 정보나 카더라 통신 그리고 혐오만이 가득했다. 해결책을 전할 전문가는 누구일까를 생각하기도 전에, 숱한 유언비어들은 이미 ‘여론’이 되어 있었다.
저들끼리 갇혀서 물고 뜯는 좀비의 집 속에 사는 느낌이었다. 일부는 뉴스 속보나 정보를 외면하기도 했다. 심리적 스트레스가 심하다는게 이유였다. 나라걱정에 일상을 쏟지 말자는 물결도 일어났다. 그러다가도 이슈가 물꼬를 틀면 아귀떼처럼 몰려들었다.
요 근래 SNS에는 다시 나들이를 가고 생일파티를 하고 뷔페를 먹으며 이태원 술집에서 줄을 서는 사람들의 소식이 올라왔다. 어제까지는 대차게 물어뜯으며 분노하던 좀비들이, 벚꽃 향기에 취해 ‘순한 양’이 되어버린 걸까.
문제는 그 좀비 바이러스가, 미국 한인타운에 도착해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인은 바이러스의 이름도 구분 못하던 지난 1월 무렵부터, 미국 내 한인들은 한국이 망하기 직전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이민오길 잘했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청정국’에 데려와야 한다며 저마다의 ‘부심’을 부렸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무늬만 한국인’들은 늘 한국의 대통령과 정치 상황에 훈수를 두느라 침을 튀겼다.
그러다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국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한 것.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 놈들은 마스크를 안 써”라면서 무식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미국이 좋죠’가 하루아침에 ‘이참에 한국가서 살고 싶어요’로 바뀌었다. 어제까지는 ‘여기선 마스크 안 써요’라고 하면서 여행기를 올리던 해외생활 기반의 유튜버들이, 오늘은 갑자기 얼굴을 바꾸고 ‘실제상황' '응급' '재난' 같은 자극적인 제목을 들이밀며 스탠스를 바꿔 영상을 찍었다. 한국 유사언론의 낚시 패턴을 그대로 물려받아 '조회수'를 노리고 있는 것인지 언제나 마지막엔 ’구독‘을 부탁했다.
한인교회에서는 개인위생 관리 문제를 두고 각축을 벌였지만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씻지도 않은 손으로 열 손가락을 쪽쪽 빨며 감자튀김을 먹는 미국인들을 보고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팔팔 끓인 콩나물국을 먹어야 한다는 둥, 마늘 몇 알을 어떻게 하라는 둥, 눈으로도 전염되니 차이나타운 쪽은 바라보지도 말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비법’처럼 공유되고 있었다. ‘우리 집 아이 봐주는 아주머니가 조선족 출신인데 괜찮을까요?’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1년간 미국에서 함께 산 아주머니라는 말과 함께. 아마도 그들에게 바이러스는 ‘신분증’을 타고 넘어오는 듯 보였나보다.
중구난방의 콘텐츠와 여론을 개인의 양심과 지적 상황, 이성에 따라 알아서 거를 수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일까. 바이러스의 위험성보다, 개인이 스스로 방에서 만든 ‘코끼리 그림자’의 위험성이 인간에게 더욱 해롭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난 몇 달이었다. 아무도 ‘정의’나 ‘이성’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가뜩이나 열 받는데 물어뜯을 대상을 만났으니, 일단 죽자고 달려드는 좀비 떼의 향연같았다.
우리에게 ‘누구도 외딴섬은 아니다’ 라고 위로하며 종을 울릴 사람을 찾는 시대는 간 것일까.
조금 늦게, 미국이 반응했다.
판데믹 선언에 트럼프 대통령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엊그제까지는 “감기로 매년 몇 만 명이 죽는 줄 아냐? 걱정 마”라고 트위터를 날리고 대선전략을 위해 골프를 다니던 그가, 울며 겨자 먹기 표정으로 단상 앞에 섰다. “한국 영화에게 아카데미 작품상을 주다니 말이 되냐”던 그가, 한국의 바이러스 대처 모범사례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며 수긍하겠다고 했다. 감기 따위로 병원 가지 않는 나라, 영화 ‘선셋대로’의 그레이트 아메리카를 굳세게 붇잡고 있던 ‘수장’의 자존심은 요즘 많이 상한 모양이다.
“잠시만 돌아다니지 말라”
그러자 미국의 대형마켓에선 휴지가 동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휴지가 ‘보호 심리’를 건드리기에 사재기의 주범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중국 휴지 원재료 수입길이 막혔다’는 정체불명의 카더라 통신 때문이었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가려고 휴지를 사재끼냐는 조롱 섞인 인터넷 댓글들에도 ‘마스크를 더 사야 하는 게 아니냐’는 혜안은 보이지 않았다. 대형마트는 결국 1인당 휴지 구입 제한을 시작했다. 백인들은 서로 마주쳤을 때 입은 안 가려도, 생필품은 전투적으로 사재기를 했다. 마스크는 안 써도, 시리얼은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웃기게도 아시안 마트에 가면 곡식 종류나 라면, 신선한 야채와 해산물이 여전히 그득했다. 미국인들이 보여준 사재기는 무엇을 위한 사재기였을까. 무엇이 두려워서 휴지 사재기를 하는가의 ‘주체’가 상실된 채 어영부영 패닉만 공중에 둥둥 떠다녔다.
여전히 레스토랑은 ‘투고 (To-go, 주문포장)’을 해 가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고 각 주에서는 ‘몇백 명 이상 모이지 말아라’ ‘되도록이면 일을 쉬어라’등의 가벼운 방침을 내 놓았다. 미국인들은 ‘Stay home' 운동을 하자며 각자 집안에서 데코레이션과 고급 취미, 요리를 해 먹는 사진을 SNS로 공유하더니, 겨우 며칠 지나지 않아 집에 머무는걸 못 견뎌했다. 3월 21일에 누군가 찍었던 뉴욕 타임스퀘어의 사진을 보니, 약 백여 명 정도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걷고,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있었다. 일부 골프장도 열었다. 다만 카트에 한 명씩 타고 이동한다는 조건이었다. 마스크는 여전히 눈총의 대상이고, 차별의 원흉이지만, 집에만 있자니 미칠 것 같으니 그냥 나간다는 젊은이들도 늘어났다. 판데믹 선언과 트럼프 권고가 있은지 단 일주일도 안 된 시점이었다.
미국에서 마스크란
아시아 인들이 마스크 쓰기를 조금씩 시작하고 있다지만, 미국에서 마스크를 쓴다는 것은 여전히 상식 밖의 일처럼 통용된다. 중병이 걸린 채 병동을 탈출한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혹은 무장강도가 아니고서야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괴상한 짓’인 것이다. ‘병 걸린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다. 작년 어느 날 기침감기가 심해져 뉴욕 브루클린에 마스크를 쓰고 나갔다가, 차안에서 총을 쏘는 듯 손짓을 하며 “병 걸렸으면 병원에서 나오지 마!” 하는 흑인 무리의 조롱을 들어야 했었다. 우리야 미세먼지 영향으로 마스크가 대중적이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마스크를 쓰고 지나간다면 곁눈질하지 않았는가.
아시아 사람 몇몇은 마스크를 썼다가 주먹으로 맞았다든지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후기를 올리기도 했다. 아메리칸 아시안들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 인종차별을 멈추라는 글을 올려댔다. 그러면 또 악플이 달리고, 악플에 악플을 다는 물결이 밤새 이어졌다. 영화사 디즈니는 비난을 무릅쓰고 중국 여배우 유역비를 내세운 ‘뮬란’의 실사판 영화 프로모션을 강행했고, ‘인어공주’ 역할로 흑인을 선택했다. 가수 머라이어 캐리는 마치 손을 ‘처음 씻어보는 듯’ 자세하고 나긋하게 설명하는 동영상을 찍어 올렸다. 그녀의 금칠 투성이인 고급 대리석 화장실에서 실크 잠옷을 입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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