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4시간을 날아 간 텍사스에서 우버 택시를 탔던 때의 일이다. 제대로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인 오래된 포니 차를 끌고 온 흑인 할머니가 “나도 친구를 보러 뉴욕에 다녀온 적이 있지”라고 말했다. 뉴욕에선 아무도 웃지 않는데,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웃으면서 인사하고 지나치게 친절해서 놀랐다는 내 이야기에 “그럴만도 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내가 지하철 옆자리 사람에게 말을 걸었더니 내 친구가 ‘여긴 뉴욕이야, 아무에게나 웃으면 미친 줄 알아’ 라고 하더라고! 오 마이 갓, 나는 텍사스가 좋아. 여유로운 텍사스가 최고야”
비록 이방인으로 잠시 뉴욕에 머물렀을 뿐인데도 몸에 배어버린 ‘시크한 척’ 때문에 다른 도시에 가면 곤란했던 때가 종종 있다. 길거리를 지나갈 때 모르는 타인이 인사를 하면 ‘미친 사람일까?’ ‘노숙자인가 마약 팔이인가?’ 싶어 쌩 하고 지나쳐 버리거나, 까마득하게 한참 남은 거리에도 문을 열고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에게 미안해 빠르게 뛰어간 적도 있었다.
실제로 맨해튼을 걷다 보면 심각한 표정을 한 사람을 많이 만난다. 그렇다고 그들이 현재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거나 큰 일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 빨리 걸어야만 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빨리 걸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직각의 계획도시 속을 빠르게 오간다. 높은 인구밀도, 관광객과 그들을 피해 걸으려는 뉴욕 시민들의 움직임은 매일 도시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뉴욕에 노숙자가 많다는 것도 ‘빠른 걸음’의 이유가 될 것이다. 맨해튼에 머물다 보면 “돈 좀 달라” “먹을 것 좀 달라”며 앞길을 막는 노숙자를 최소한 두 세명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마약을 사라고 제안하는 사람들, 담배를 낱개로 파는 사람들, 불법 환전을 하는 사람들도 수시로 말을 거니 인상을 찌푸리고 빠르게 걸을 수밖에. 아무 생각 없이 행인들에게 배시시 웃었다가는 “돈 내놔, 돈 많은 아시안아”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 곳이 뉴욕이다.
지하철은 또 어떠한가. 여유 있게 천천히 걷다가는 쓰레기와 침과 팔뚝만한 쥐만 발견할 뿐 별로 도움이 될 게 없다. 얼른 목적지로 가기 위해 더러운 지하철에 빠르게 몸을 싣고 또 빠르게 빠져나가야 한다. 뉴욕의 지하철은 24시간을 운영 하지만, 자정이 넘은 시간의 탑승은 말리고 싶은 게 사실이다. 새벽녘엔 노숙자들의 호텔이 되고, 술 취한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많은 맨해튼 중심부를 오가는 라인은 그럭저럭 괜찮겠지만, 다운타운을 지나 브루클린과 퀸즈로 향하는 라인을 탄다면 조심해야 할지 모른다. 할렘보다 더 할렘 같은 브롱스 방향은 하루 종일 조심해야 한다.
오래된 뉴욕 지하철은 수시로 운행에 차질이 생긴다. 사정이 생겨 라인이 폐쇄되거나, 고장이 나거나, 노선을 잘못 타 역을 지나쳐버리기도 한다. 그 때마다 지하철에선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빠른 목소리로 (마치 랩처럼) “오 미안한데 지금 지하철 못 와. 버스 타거나 다른 라인을 타렴” 하는 안내방송이 무심하게 나온다. 어떤 때는 “내가 실수로 이 지하철역을 안 서고 지나쳤어. 다음 역에서 내리렴, Sorry”하는 멘트가 나온 적도 있다. 운행에 변동사항이 있을 때, 지하철 내 기둥에 A4 용지 크기의 안내문이 걸리는 날은 그나마 친절한 날이다. 청소하는 분들에게 겨우 묻고 물어 ‘노선 운행 중단’ 소식을 알게 된 날도 적지 않았다.
이런 뉴욕에서, 어떻게 행인들에게 웃어 보이며 천천히 걸을 수 있을까.
‘노숙자가 당당한 도시’도 뉴욕에게 붙이고 싶은 별명이다. 지하철을 타면 큰 소리로 랩 하듯이 외치며 지하철 안을 터벅터벅 걸어 다니는 ‘래퍼 노숙자’를 만날 수 있는데, 이거 자세히 들어보니 돈이나 먹을걸 달라는 소리다. 수준급의 춤과 노래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바구니를 내미는 ‘양심적인 버스커’도 있지만, 노숙자들은 캐리어를 열고 “바나나 혹은 먹던 과자도 괜찮으니 줘봐” 하며 승객들의 눈을 쳐다본다. 언제는 브루클린 8ave의 무한리필 초밥집 앞에서 만난 노숙자가 “25달러만 줘, 너 돈 많은 차이니즈 잖아” 라고 말했다. 왜 25달러냐고? 그 초밥집의 무한리필 가격이 24.99 달러였다.
그런 일들을 근 일년 가까이 겪고 나니, 덩달아 나도 뉴욕에서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주머니와 가방을 필사적으로 사수하고, 타인이 말을 걸면 무시로 대답하는 스킬을 몸에 익혔다. 무단횡단, 신호를 무시한 운전, 꽉 막힌 교통체증과 크락션 소리, 엠뷸런스 소리, 불시에 시작되는 뉴욕 경찰의 ‘체포 쇼’에 익숙해진 뒤에는 'F**k' 같은 비속어도 사용하게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공주같은 드레스를 한껏 차려입고 나서다가도 혼잣말로 비속어를 내뱉는 거친 말버릇도 생겼다. 누군가 나를 귀찮게 하거나, 은근한 인종차별의 눈길을 느낄 때면 참지 않고 ‘들이받는’ 과감함도 생겼다. (물론 상대방의 인상을 봐 가면서 들이댄다. 마지막 소심함이랄까)
뉴욕의 작은 동네들에 있는 그로서리(수퍼마켓)에 가면 무표정으로 앉아 “얼마입니다” “다음” 하는 소리만 반복하는 주인들이 있다. 만약 아주 친절한 도시에서 온 들뜬 여행자라면, ‘내가 돈을 적게 냈나?’ ‘저 주인이 뭔가 화가 났나?’ 오해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서로의 바쁜 삶에 굳이 침투하지 않겠다는 뉴욕 사람들끼리의 ‘암묵적 냉랭함’이 느껴진다.
맨해튼에서는 소위 ‘어깨빵’(길에서 타인에게 어깨를 부딪치는 일, 속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리저리 휩싸이는 관광객들 무리에 잘못 들어가 어깨를 맞고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핸드폰을 보며 빠르게 걷는, 혹은 전화를 하면서 걷는 사람에게 ‘어깨빵’을 당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때 마다 그 사람을 붙잡고 ‘저기요, 익스큐즈미’ 하고 사과를 바란다면 무리다. 이미 그 사람은 몇 미터 뒤로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중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인은 미국인이구나’ 싶은 순간이 있다. 그건 ‘질문’을 했을 때인데, 적당하게 괜찮아 보이는 ‘일반 시민’들에게 길을 물어보거나 지하철 노선 혹은 가게 이름을 물을 때엔 굳어있던 얼굴을 풀고 웃는 게 뉴욕사람들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이리저리 검색을 하며 알려준다. 또 길거리에서 연주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들에게 박수와 엄지를 치켜 세워주는 너그러운 시민들, 훌륭한 패셔니스타를 만났을 때 “당신 오늘 정말 멋지네요!” 하고 칭찬을 보내주는 뉴욕 사람들은 차가운 도시에서 만난 따뜻한 커피같다. 그러나 볼일이 끝나면 다시 ‘이마 주름’을 장착하고 빠르게 길을 걸어가는 뉴욕 사람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나 다름없다.
메디슨 파크 역시 ‘그나마 웃는 뉴욕 사람들’의 장소다. 강아지 공원으로 유명한 메디슨 파크는 개똥냄새 천지인데 ‘개 사랑’으로 뭉친 뉴욕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 “오 너희 강아지 너무 귀엽다” “우리 퍼피가 너희 강아지를 좋아하나봐!” 하며 웃음을 보인다. 매개체가 있어야 웃는 사람들, 뉴욕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집을, 뉴욕 최강의 ‘친절 구역’은 역시나 명품 매장이다. 잘 차려입은 동양인이 들어선다면 100%다. 맨해튼 명품 매장엔 이미 중국인 직원들이 절반 이상이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가방을 색깔 별로 줄 지어놓고 “하나만 살까, 다 사버릴까”를 고민하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들 앞에서 제 아무리 뉴욕 사람이라도 아니 친절할 수 있겠나.
돈 앞에서의 미소는 만국 공통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