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겨울은 길어도 너무 길다.
무언가를 기획하고, 쓰고, 출판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생계를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도시생활의 재미와 유익까지 챙겨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겨울이 흘러간다. 뉴요커라면 응당 멋스러운 외투를 입고 맨해튼을 걸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괜한 스테레오 타입에 자신을 묶어두기도 하지만, 유행하는 바이러스를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엔 담요와 털모자 신세다. 언제까지 이 얼음과 눈과 쓰레기가 뒤엉킨 거리에서 웅크려야 하는지 하소연이 나오지만, 기가 막힌 예술영화처럼 멋스럽게 융화되는 도시의 해질녘과 밤의 야경에 또 한 번 무릎을 꿇는다. 그래, 여긴 뉴욕이니까 참을 수 있어 하고.
뉴욕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 많다. 각자 본국에서 그럴듯한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람들도 뉴욕에서는 지하철을 돌아다니는 쥐 신세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될 때가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뉴욕에 똬리를 튼 애벌레들이, 나비 혹은 용이 되기 위하여 두더지처럼 지하와 상층을 오간다. 그 틈에 내가 있다. 2불짜리 지하철을 타고 내려 최고의 패션인사 안나윈투어의 리무진을 구경한 내가, 조그마한 일거리를 위해 수 억짜리 작품이 걸린 갤러리 투어를 다니는 내가, 언젠가 책이 될지도 모르는 뉴욕여행기를 엮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쏘다니는 내가, 섹스앤더시티의 주인공 마냥 커피숍에서 노트북을 켜고 이메일을 보내는 내가, 영화촬영하는 풍경과 모델들의 런웨이와 주식상장을 알리는 종소리와 차이나타운의 설날 폭죽소리와 케이팝스타 광고가 나오는 뉴욕에 내가 있다.
뉴욕에서의 한 달은 다른 곳에서의 일 년보다 더 숨 가쁘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부담감은 누군가를 고속성장으로 이끌 수도, 염증을 느껴 완전히 떠나게 만들 수 있는 '도시의 정체성'이다. 어느 때는 이런 생각도 든다. 그저 이 도시에서 오래 버틴 자가 승자라고. 빌딩이 부러지고 경제공황이 터져도, 여전히 시들거나 튕겨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진짜 승자다. 그런 '뉴요커'가 되기를 꿈꿔보며, 작은 순간들을 성실하게 쌓아보기로 결심한다. 이를테면, 사진과 함께 간단한 일기를 꾸준히 기록하는 것. 누군가 봐주지 않고, 누군가 수천만 원의 인세계약을 해 주지 않아도, 넷플릭스가 나의 소설을 드라마화해주지 않아도, 여전히 송출되는 나의 30대 젊은 뉴욕 시절의 기록 작업 말이다.
두서없이, 사진과 올리는 뉴욕 겨울의 일기들.
#1
맨해튼엔 어딜 가도 ‘백 년 된‘이 따라붙는 장소가 많지만 관건은 얼마나 뜯어고치고 보완했냐의 문제 아닐까. 오래된 장소가 점점 더 깨끗하고 모던해지면 외면하고픈 마음은 얼마나 빈티지인 걸까? 카페라면 이골이 나게 잘 아는 뉴요커들의 까다로운 기준에 합격한 백 년 된 카페. 오래된 것들이 만든 진한 무르익음. 다닥다닥. 바쁜 도시인들.
#2
뉴욕패션위크 현장 스케치를 다녀왔다. 안나 윈투어도 보고, 세계적인 모델이나 스타들도 멀리서 봤다. 이들을 찍기 위해 모인 세계의 포토그래퍼와 경호원들 사이에서 내가 생각한 건 별게 아니었다. 아, 너무 춥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패션쇼를 위해 헐벗고 포토라인에 서는 사람들과 기회를 얻기 위해 하이힐을 신고 뛰어다니는 청춘들 부디 독감으로부터 안녕하기를.
#3
유명한 갤러리에서 일하는 큐레이터 친구가 생겼다. 그녀의 초대로 갤러리워크 오프닝 파티에 다녀왔다. 10개의 갤러리가 연합해 피카소 초기 스케치본이나 달리의 희귀한 그림, 앤디워홀, 데이빗 야로우 그리고 키스해링 같은 고가의 작품들을 우리 손 위에 올려주는 이토록 친절한 파티가 또 어디 있을까? 솔직히 명품백 가격 만 불에 육박하는 시대에, 비슷한 값이면(혹은 그보다 더 저렴한 것도 많다, 지갑이나 스카프 몇 개 가격쯤) 유일한 ‘아트 피스’ 하나 정도 우리 집에 오래 걸어두는 일이 더 가성비와 가심비 모두를 채우는 소비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4
취향에 시간을 쏟는다는 것은 여유 있는 삶이라는 것, 뉴욕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보이는 예술서점이 많다. 도무지 지갑이 열리지 않는 고가의 책들, 그러나 구경은 공짜다. 여유도 시간도 많은 사람들을 위해 편안한 의자도 배치해 뒀다. 예술은 모든 삶을 아름답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판타스마고리아의 환등상幻燈像이다. 그 아비투스가 맞물려 고고함의 절정을 이루는 서점들이, 뉴욕 곳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취향은 얼마나 고고한가요?
#5
어느 날 지하철에서 무함마드 알리 같은 사람과 예수님처럼 생긴 사람과 술 취해 혼자 떠드는 사람을 한 프레임으로 만났다. 성聖과 속俗과 락樂이 충돌하는 삼중주. 그 틈 사이로 구걸하는 남미 여자와 조용히 하라고 소통 치는 할머니도 지나갔다. 멀끔한 수트를 입은 잘생긴 남자와 가슴을 반쯤 내놓은 유럽 관광객도 지나갔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훅 들어오는 뉴욕의 침범자들. 충만한 영화적 비주얼과 소음 속에서 나는 제법 평화롭게 독서를 했다. 성공했다. 이 정도면 오늘은 성공한 거다. 뉴욕에 처음 온 사람들은 센트럴 파크가 보이는 수백억짜리 집에 입성해 세계산업을 주무르는 친구들과 겸상하는 '메트로폴리탄'의 꿈을 꾸지만, 실제 뉴욕생활의 짬이 쌓이면 소음과 냄새와 자본과 현실감각 사이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고 계속 살아남는 '고요한 생존력' 자체를 동경하게 된다는 걸.
2025.02 From New York.
(뉴욕에 살면서, 여행책 작업과 프리랜서 칼럼기고 그리고 해외생활 관련 글 작업을 하는 작가입니다. 최근 스레드를 시작했습니다. 산발적으로 올라오는 짧은 일기는 그곳에. 아이디는 jennydeer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