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바쁩니다. 도시 중의 도시, 뉴욕이라면 더욱이요. 하지만 도시는 소음이 짙을수록 외롭습니다. 때로는 고독하기도 하고, 어쩔 땐 고요한 평화마저 느끼게 되죠. 이상하죠, 왜 우리는 이 사람 많고 복잡한 도시에서 되려 외로움이나 고독을 호소할까요? 어쩌면 소음 속에서 되려 적막함을 느끼고, 웅성거림 안에서 오히려 가라앉으며, 사람들 속에서 방음벽을 치게되는 어떤 도시의 역설, 그 어반 패러독스 때문 아닐까 생각해봤어요.
이런 군중속의 고독은, 사실 짜릿합니다. 오히려 ‘거룩한 사치’라는 생각까지 들죠. 생업과 고난에 허덕이는 인생 입장에서는 사실 이 뉴욕이라는 비싼 도시에 살면서 음악이나 듣고 상념에나 빠지는 저를 두고 사치스럽다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구나의 인생에는 자신만의 십자가와 비워내야 할 재떨이가 있습니다. 어젯밤 타고 남은 재를 아무도 없는 고요한 풀밭에 버리는 대신, 저는 이 복잡한 도시 위에 흩뿌리는 것으로 대신할 뿐이죠.
도시는 온갖 향과 반짝임이 한데 모여 있는 고급 백화점 향수코너 같아서, 가끔 눈과 코와 입을 막고 혼자 있을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혼자 있는 행위에서 오는 극락같은 기쁨이란게, 결국 ‘혼란스러웠던 과거’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어쩌면 ‘휴식’이라는 것은 도시 안에서 해야만 더욱 와 닿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도시의 환락은 오히려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바깥이 시끄러울수록, 나는 나의 목소리가 절실히 궁금해집니다. 축제가 화려할수록, 나는 나 혼자만의 무대에 선 나를 강렬히 원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청춘, 감수성, 예술성, 자아와의 조우 같은 건 사실 ‘혼자일 때’ 찾아오고, 그건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 아닌 복잡한 도시에서 오히려 강렬하게 대비됩니다. 시끄러운 카페의 소음을 적당한 양념삼아 집중하는 사람들이나, 빠르게 오가는 교차로의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느끼게 되는 삶의 철학은 어렵지만 단순한 것 같아요.
알베르 카뮈는 소란 속에서 삶의 부조리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꼈다고 했고, 샤를 보를레르는 진정한 방랑자는 군중 속에서 자신을 집처럼 느낀다고 했답니다.
나는 바쁘고 복잡한 뉴욕을 홀로 거닐며, 조용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진짜 나를 봅니다. 시끄럽고 화려할수록 더욱 빈털터리인 나를 오롯이 조우하게 됩니다. 어느 유명한 산이나 천혜의 자연이 주지 못한 ‘도시적 수양’이 내내 영혼을 두드립니다. 소음을 배경음 삼아 빠지는 사색은 생각보다 깊고, 온갖 색채와 존재들 속에서 마주한 내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정갈합니다. 웅성거림 속에 자꾸만 작아지고 작아지다 결국 점이되어 평온해지죠.
가끔 저는 뉴욕에서 쓸데없어 보이지만 꼭 필요한 일들을 합니다. 말하자면, 뭐 이런거요.
하나, 목적지 없이 버스 타고 달리기
둘, 랜덤 플레이리스트의 음악을 듣기
셋, 아무거나 사진 찍어두기
넷, 핸드폰 끄고 노트 열기
다섯, 벤치에 앉아 있다가 옆에 앉는 사람에게 말걸기
여섯, 생활에 아무런 필요가 없는 쓸데없는 물건 사기
일곱, 낯선 언어 쓰는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기
여덟, 엽서 하나 사서 아무에게나 보내기
아홉, 다리가 아플때까지 무작정 걷기
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눈치 보지 않고 춤 추기
곧 해가 지기 시작하고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누군가 화양연화, 인생의 호시절을 묻는다면 저는 주저앉고 지금이라고 말하겠어요.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이런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호사를 언제까지 누릴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수백개의 영화를 보고난 것처럼 은은한 감동에 휩싸이고, 몇 번의 기도를 마친 것처럼 마음이 비워집니다. 지하철이 브루클린 브릿지를 달리는 사이 창 밖에는 반딧불이 같은 자동차 헤드라인과 잠을 잊은 사람들의 우글거림과 빌딩 창문마다 매달린 별들이 가득합니다. 허드슨강에 잠든 꿈의 고래가 묵직하게 나의 인생 한 페이지를 채웁니다.
그리고 또 말합니다.
안녕 나의 도시, 오늘도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