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부유함을 자랑하는 방법
미국에서는 노골적으로 ‘돈’을 생각하게 된다. 생존과 돈의 긴밀한 연결고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선비의 나라에서 온, 돈에 대해 꼬집어 이야기하는 걸 ‘낯 뜨거운, 수준 낮은’ 일이라고 배우며 자란 나 조차도 뉴욕에 살다 보니 점점 자본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많아진다. 아무래도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고물가의 도시, 자본주의의 중심이기 때문이리라.
최근 한 커뮤니티에서 뜨겁게 떠오른 주제가 있다. ‘미국 부자’ 경험담에 관한 이야기였다. 평소에는 자신의 커리어나 이민생활 이야기를 고고하게 하던 ‘미국 전문가들’도 댓글로 뛰어들어 “내가 본 부자는 이렇다” “내가 본 부자가 더 어마어마하다”며 혀를 내두를 만한 에피소드를 앞 다투어 쏟아냈다.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의 ‘올드머니’는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 공통 결말이었다. 거기에 미국 내 중국부자, 인도부자, 중동부자 이야기가 합세했다. ‘한국인은 왜 그렇게 못 되는가’에 대한 담론까지 따라붙으며 며칠 내내 뜨거운 감자였다.
최근 미국에서 새롭게 뜬 ‘부의 자랑’ 트렌드가 있다. 다름 아닌 ‘새’다. 미국 부유층의 생활을 꼬집은 드라마에서부터, 성공한 사업가의 인터뷰에서도, 영국 왕자와 결혼한 미국 여배우의 다큐멘터리에도, 또 그걸 추종하며 부유한 라이프스타일을 뽐내는 인플루언서들의 SNS까지 ‘새’가 등장하고 있다.
해당 트렌드는, 집 없는 새 거둬들이기-> 새 사진과 영상 찍기 -> 자연으로 돌려보내기의 루틴을 따른다. 동물을 사랑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듯 한 이 취미는 이상하게 부유하다. 새를 위해 고급스러운 정원을 꾸려놓고, 좋은 먹이를 사다 놓고, 타임랩스 영상을 찍으며 울고 웃고, 장례식까지 거나하게 치른다. 가만히 보니 뼛 속까지 자본주의다. 일 하느라 바쁜 다수의 서민들은 새를 돌보거나 관찰할 시간도, 멋진 정원을 꾸려놓고 고급 새 먹이와 장식품을 준비해 놓고 카메라를 종일 설치해 놓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부유한 이들과 가장 조그만 떠돌이 새의 아이러니한 조합이다.
이 트렌드는 미국인들의 ‘자랑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확실히 내가 자란 한국, 혹은 내가 경험한 동아시아식 ‘부의 자랑’과 결이 다르다.
우리는 자랑에 대해 흔히들 후진국에서 온 사람이나 졸부들만 자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오해다. 미국이야말로 자본주의와 자랑이 필수인 곳인데 그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에 묘하게 자랑 같지 않게 느껴질 뿐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한국에서는 “저는 00을 졸업하고 00에 근무하다 00 기업을 키워 지금은 오너가 되어, 평생 꿈이던 한강뷰에서 수입차와 와인을 모으며 산다.”를 앞에 두고, 그 뒤에 “주말엔 유기견 봉사도 가고 무료강의도 하면서 살지만 사실 이건 피땀눈물 때문이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해요” 등의 순서로 간다. 선 자랑이 너무 거창하고 길기 때문에 노골적이게 느껴진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저는 그저 길 잃은 새에게 밥을 주고 새 영상을 찍으면서 기쁨을 느끼는 평범한 자연주의자입니다.”라는 말을 앞에 두고, 그 뒤에 “뭐... 평일엔 조그만 IT 기업을 운영하고 제 명의로 된 숲에 정원을 꾸미며 보람을 느끼는 00 동네(부촌) 주민입니다만”을 붙인다. 순서만 바뀌었는데도, 이상하게 수준 있는 자랑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소비 자랑’도 결이 다르다. 한국인들은 “이번에 차 바꿨는데 어휴, 기름 더 많이 들고 별로야. 애들 캐나다 구스 사주고 골프 시키느라 허리가 휘어져.”라는 ‘소비 품목’을 드러낸다. 반면에 미국인들은 “어휴, 이번에 우리 강아지 집 고치느라 오만불이나 내고, 우리 아이 학교 기부금 내느라 허리가 휘었어... 크리스마스에 사람들 초대 앞두고 새로운 소나무와 미술작품을 좀 들여놨는데 사람들이 재밌어하면 좋겠네.”라며 ‘가치’에 돈을 태운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대대손손 미국 남부 부자로 살아온 사람들은 흙 묻은 부츠를 신고 전용기에 탄다고. 또 누군가는 말한다. 뉴욕 부자들은 백억짜리 집에 살면서도 쥐가 드글거리는 지하철을 탄다고. 또 누군가는 말한다. 아시아 부자들은 저소득 혜택을 받으면서 벤츠를 타고 집에 가서는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둔 현금을 센다고. 혹은 가상화폐나 온라인사업으로 벼락부자가 된 젊은이들은 부유함을 드러내거나 과소비하는 것을 보여주는 걸 꺼리지 않는다고. 물론 정답은 없고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한국이나 미국이나 ‘톱스타의 조 단위 이혼 가십’ 혹은 ‘2억짜리 인형 낙찰받은 뉴스’ 같은 게 주요 토픽인 걸 보면 확실히 ‘부유함’은 동서를 막론하고 뜨거운 감자임은 분명한 듯하다.
차이나타운 중에서도 가장 노동자 비율이 많고 땅 값이 싼 지역에 갈수록 소리가 시끄럽다. 지나가는 남자들이 죄다 허리춤에 열쇠 꾸러미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마치 ‘우리 집엔 방도 많고 차도 있고 자전거도 있고 금고도 있고 아무튼 열쇠로 잠그는 것이 많다’는 부유함을 드러내는 듯이. 한인 교회에 가면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눈물을 보이던 사람들도 점심밥상 위에는 죄다 명품 가방을 올려놓는다. 아이들의 교육에는 돈을 아낄 수 없다고 하다가도, 한인들의 미래가 될 한인 지자체의 기부 행사에는 고개를 돌린다.
벌새는 화려하고 예쁘게 등장해서는 초침보다 빠르게 날갯짓을 하다가 금방 사라진다. 너무 짧게 왔다 간 ‘한낮의 꿈’ 같은 것이다. 부엉이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가만히 앉아 침묵으로 눈만 깜빡인다. 오래 머무는 ‘한 밤중의 정령’ 같다. 한바탕 자랑 같은 벌새의 삶을 짧게 살 것인가, 아니면 적막과 미풍에서도 늘 그 자리에 서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부엉이처럼 살 것인가. 돈 이야기를 하다가 뭐 이런 필요이상의 고민과 철학이 생기는 이곳은, 뉴욕이다.
• 뉴욕 거주 여행작가,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프로필 출간 기고 등 작업 문의 : https://litt.ly/jennyde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