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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네오 Sep 03. 2020

#2 내게 스토리가 없는 이유

도망친 과거를 찾습니다

전역 이후, ‘재밌는 이야기’에서는 벗어났으나 진짜 사회는 내게 '다른 이야기'를 요구했다.

(‘재밌는 이야기’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이전 글 링크를 걸어둡니다. 재미없음에 주의하시길.)


단순한 시간 때우기나 호기심 차원이 아닌 태도와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진지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듣는 것에만 익숙했던 내게 스스로를 소개하고 포장하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지금껏 나는 나와 대면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세상 누구보다 나에 대해 잘 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관심의 대상을 내가 아닌 타인으로 바꿨다.


타인을 향한 관심은 살면서 많은 도움을 줬다. ‘눈치’라고도 불리는 이 스킬은 꽤나 쓸 만하다. 엄마의 작은 어조 변화에서 뭘 원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고, 친구와의 카톡 대화만으로 기분을 유추하기도 한다.(친할수록 더 잘 맞힌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눈치가 빨라야 고용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이렇듯 사회생활 스킬에 꼭 빠지지 않는 게 눈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건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을 때, 채용이 됐을 때의 문제다. 익명의 인사담당자가 볼 자기소개서에는 눈치가 통하지 않는다. 나를 어필할 수 있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내가 나 자신을 소개하는데 왜 이렇게 할 말이 없을까? 내겐 왜 괜찮은 스토리가 없을까?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부족해서

음식 맛을 좌우하는 첫 번째가 신선한 재료이듯, 스토리를 구성하는 기본 재료는 경험이다. 조미료(MSG)를 말하는 게 아니다. 조미료는 재료로 승부를 보지 못했을 때 넣을지 말지 고민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적당한 재료가 없다면 요리를 해 볼, 회사에 지원서를 써 볼 의지마저 사라지고 만다.


다양한 경험을 쌓지 못한 데는 신중한 성격 탓이 크다. 일단 저지르고 생각하자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무모하게 보일 때가 더 많았다. 특히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았기에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충분한 고민과 확신이 필요했다. 대학 때 했던 아르바이트를 떠올려 봐도 교내 출판문화원, 기록실, 매점 등에서 비슷한 행정 업무만을 담당했다. 학교 안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는 대기업이나 NGO단체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몇 번 하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부담이 없는 단기였다. 꼭 스토리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업무에 도전해 시야를 넓히지 못한 게 아쉽다.


스토리를 말하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소재가 많지 않더라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취업 강사의 말은 용기를 준다.(아까 말한 MSG를 이럴 때 넣으라고 하나보다.) 그럼에도 아직 문제가 남아있었다. 내 이야기를 자주 해본 적이 없다는 것.

친구들과 만나면, 특히 여럿이서 모일 때면 내 포지션은 ‘리스너’다. 의도한 건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원래 말수가 없어서 그렇냐고? 그건 아닌 것 같다. 주목은 받고 싶은데 너무 튀는 건 싫은 ‘샤이 관종’이 내 얘기니까. 말 잘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다가 내가 바통을 이어받으면 살짝 겁 날 때가 있다. 

‘내 이야기는 저렇게 재밌지 않은데 어떡하지.’


내 스토리에는 강약이 없어서

이건 장점이면서 단점이기도 하다. 두 번째 이유와도 연관되는 건데 말 잘하는 친구들은 어쩜 그렇게 매번 기승전결을 만들어 오는지 놀랍다. 분명 같은 사회를 살고 있는데 내게 드문 위기나 갈등이 왜 그들 앞에는 자주 나타나는지. 그들의 이야기가 커브라면 내 이야기는 느린 직구에 가깝다.(밋밋한 변화구일 수도.) 삶이 평탄하다고 생각하면 장점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렬함이 없다고 생각하면 단점이다. 문제 해결 능력을 요구하는 자기소개서에선 단점에 가깝다.


기록하지 않는 습관 때문에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하다. 아무리 많은 일을 경험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풍부한 감정을 느껴도 기록하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지난 수십 년 간 쓸 만한 재료를 축적해두었음에도 구석에 방치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일기가 부담스러워 메모를 택했다. 메모는 내게 레시피와도 같다. 난 레시피를 들고 소중한 인생의 스토리가 제 풍미를 뽐내며 매력을 발산할 수 있도록 글을 쓴다. 글을 쓰며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밝힌다.

내게 스토리가 없는 이유는 정말 이야깃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다.(남들보다 적기는 하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느라 나에게 귀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에, 내 이야기의 필요성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내가 스토리를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도망쳐버린 것이다.


다행히 아직 멀리 가진 않은 것 같다.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오늘도 한 걸음 내디뎌본다.





p.s 매거진 첫 글('난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온 걸까?')을 연재하고 뒷마무리가 부족함을 느껴 수정했습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라이킷을 눌러주신 브런치 작가님들 감사합니다.

수요일 연재를 스스로에게 약속했지만 글 쓰는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릴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늦어진 발행에 반성합니다.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글이 손에 익을 때까지 연재 횟수 조정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재를 진행하시는 작가님들을 존경합니다.


(수정된 첫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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