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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네오 Aug 30. 2020

#1 난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온 걸까?

재밌는 이야기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야 재밌는 얘기 좀 해봐.”


지나가다 툭 뱉은 선임의 한마디에 머릿속에선 소재를 찾기 위한 레이스가 펼쳐진다. 물론 열에 아홉은 헛뜀박질에 그친다.


근무에 들어가면 종종 나에게 ‘재미’를 요구하는 사수들이 있었다.

‘어휴 또 시작이네. 내가 개그맨도 아니고 그런 게 어딨어.’라는 말을 면전에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군대에선 일단 참고 봐야 한다. 연인도 아닌 것이 같이 볼 날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땐 말 잘하는 동기들이 부러웠다. 나보다 적은 나이인데도 언제 그렇게 흥미진진한 경험을 해봤는지 근무만 갔다 오면 선임들의 혼을 쏙 빼놨다.


한 번은 내게 유독 엄격하던 분대장 사수와 이른 새벽 탄약고 근무에 들어가게 되었다. 까칠하고 예민한 그의 성격을 알았기에 그날따라 말수를 아끼며 조심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그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


“살면서 제일 재밌었던 얘기 없냐. 아무거나 해봐.”

친한 선임이라면 웃으면서 “아~ 이제 그런 것 좀 물어보지 마십쇼.”하고 넘어가겠는데 이 사람에겐 없는 얘기라도 만들어서 바쳐야 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내 인생의 가장 큰 일탈인 ‘수학여행 음주 썰’을 꺼냈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친구들끼리 수학여행 첫날 밤에 마실 팩소주를 챙겨갔다가 가방검사를 하겠다는 협박에 겁먹어 숙소 밖 창문으로 던졌는데 새벽에 찾아보니 몇 개는 안 보이고 몇 개는 터져서 아쉬워하던 찰나 거실 전등 밑에 전임자(?)가 숨겨놓았던 소주와 맥주를 발견해 마시고 놀았다는 썰이다.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듣고 있던 분대장은 이야기가 끝나자 시큰둥하게 한 마디 던졌다.

“수학여행 가면 다 그런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들 수학여행 가면 몰래 술 챙겨가서 마시고 논대’라는 말이 있었기에 우리도 몰래 술을 챙겼고 중간에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결국 마시고 놀았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었다. 나에겐 그게 최고의 일탈이고 경험해보지 못한 떨림이었을지라도.


그 날 이후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됐다.

‘내 인생에서 누군가가 흥미를 가질 만한 특별한 사건이 있었나?’

‘그동안 난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온 걸까?’

과거를 자책하거나 후회하진 않았다. 나름대로는 괜찮게 살아왔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막상 내 이야기를 하려니 특색 있고 관심을 끌만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소위 말빨 좋은 동기들의 비법 소재인 일탈, 연애, 도전은 하나같이 나와 거리가 있는 키워드였다.


학교 다닐 땐 선생님 말 잘 듣고 소란 한 번 피운 적 없는 조용한 학생이었고, 대학교 강의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던 집돌이 었다. 만나는 친구만 계속 만났고, 짝사랑도 한 사람만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스펙타클한 사건은 없지만 소소한 행복과 평화로운 나날로 채워진 일상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재미없고 지루한 인생으로 비칠 수 있겠다고 느낀 것도 그때였다. ‘어차피 내 인생인데 남의 시선이 뭐가 중요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재미’를 포기했다. 사회와 단절된 철책 너머의 공간에서 나만이 가진 재밌는 경험 만들기는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대신 나만의 강점에 집중했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을 갖고 있다. 완벽한 인간은 없으며 볼록 튀어나오거나 움푹 파인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매력 있다. 타인의 지적에 의해서 혹은 자기반성의 결과로 장점과 단점을 파악한 인간에게는 두 가지 갈림길이 나온다. 단점을 보완해 무결한 인간이 되길 추구할 것인가, 장점을 강화해 특출난 인간으로 성장할 것인가.


최소한 당시의 선택은 후자였다.(현재도 후자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이유는 이후의 연재에서 밝히겠다.) 나의 강점은 경청리액션이다. 그리고 그 강점을 이용해 ‘재밌는 후임’보단 ‘잘 들어주는 후임’이 되자고 다짐했다. 근무에 들어가기 전 ‘잘 들어주자. 리액션도 잘 해주자.’를 떠올리며 들어간 건 물론 아니었다. 수십 년에 걸쳐 쌓인 듣기 내공은 정말 자연스럽게 나오니까. 이야기에 쉽게 몰입하는 내 성격도 큰 도움이 됐다.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았다. 내겐 아무런 부담 없는 천연덕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나와 근무에 들어간 선임들은 신명나게 자기 썰을 풀어주었고, 그중에는 정말 재밌는 얘기도 많았다. 내 <수학여행 썰>을 듣고 시큰둥했던 분대장도 ‘네오는 리액션이 좋아서 말이 술술 나온다’며 칭찬해줬다.(직접 들은 칭찬은 아니고, 동기의 입을 통해 들었다. 그래서 더 기뻤다.)


같이 근무에 들어 간 사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엔 참 재밌는 사람도 특이한 사람도 많다는 걸 느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잘 맞는 사수와는 친분을 쌓기도 했다. ‘재밌는 후임’처럼 급격하게 친해지진 못했지만, 나는 ‘나’ 답게 수건에 물을 적시듯이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가까워졌다.


계급이 차고 더 이상 부사수가 내 역할이 아니게 되었을 때, 얼어있는 후임들에게서 내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땐 한 마디 툭 던져본다.


 “〇〇아, 재미없는 얘기 좀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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