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가 만 노트가 여러 권이다.
매번 첫 장을 펼칠 때는 온갖 다짐으로 더 예쁘고 꼼꼼하게 채워야지라며 야심 차게 굴곤 한다. 하지만 절반도 쓰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이고 때로는 고작 서너 장을 끄적여놓고 언제 그런 굳건한 다짐을 했던가 불타는 야심을 품었던 가 까마득하게 잊은 채 책꽂이에 꽂혀버린다.
그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노트가 여러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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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장 쓰다가 지루해지면 새 노트에 자꾸 눈이 간다.
그동안 틈틈이 모아둔 노트들을 밤마다 쭉 나열해놓고 어떤 것을 고를까 고민한다. 선뜻 투명 비닐을 뜯지 못하고 며칠씩 이 노트 저 노트를 들었다 놨다 어루만지기만 한다.
요즘은 쓰다가 중간에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처음 계획과 달리 글씨들이 예쁘게 써지지 않았어도 뜯어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어도 그냥 꾹 참고 끝까지 써보려고 노력한다.
자꾸만 새 노트에 눈길이 가지만 몇 장 끄적여 놓고 버려둔 것을 생각하면 첫 마음이 아무리 크고 결심이 대단했어도 끝까지 써서 마무리하는 마음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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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도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도 이렇다.
중간중간 찢어 버리고 싶고 쓰던 노트를 책꽂이 귀퉁이에 숨겨두고 새 노트로 갈아타고 싶은 마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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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을 견뎌내고 서로 다름을 이해하며 잘 마무리해서 삶의 노트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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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박또박 써진 글씨도 있겠고 삐뚤삐뚤 갈겨쓴 글씨와 낙서 가득한 페이지도 있겠다. 예쁜 스티커와 형형색색의 볼펜으로 꾸며진 페이지도 있겠고 마시다가 엎지른 커피 얼룩이 남은 곳도 있겠다. 기쁨과 행복한 단어로 채워진 이야기가 있겠고 슬프고 분노와 좌절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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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자국 남은 페이지는 찢어버리고 팽개쳐 버리고 새 노트로 자꾸만 마음이 가게 만들 것이다. 그래도 마음을 붙잡고 마지막 장까지 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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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용케 2019년 12월 31일을 끝까지 썼다.
2020년 새 노트를 꺼낸 지 며칠이 지났다. 아직 몇 페이지 쓰진 못했지만 작년에 썼던 노트보다 더 인내심과 진득함을 가지고 쓰고 싶다. 지난번 노트보다 덜 자책하고 더 애정을 가지고 대하고 싶다. 또 찢어버리고 싶은 페이지가 생길 테고 몇 번씩 새것으로 갈아타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이번에도 그냥 끝까지만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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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2020년 나의 새해의 소망이고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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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 #에세이 #노트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쓰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