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5세, 1944

한 칸짜리 무대 위의 장황함, 그 모두를 압도하는 여운

by 김뇨롱

태어나서 처음 연극이라는 걸 접한 것은 -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 초등학교 현장학습으로 관람했던 '환경전사 아마존'이라는 연극이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가 조금씩 곁들여져 있고, 중간중간에는 관중을 의식해서 벌이는 애드립 같은 게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내용이 흥미로웠고 배우들의 연기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나이가 든 지금은 연극을 보게 될 때 그런 생각이 먼저 든다.


'대체 저 대사들을 어떻게 다 외워서, 그것도 연기를 곁들여서 선보일 수 있는 걸까?'


영화 감상문을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연극으로 글을 여는 까닭은, 바로 올리비에 경의 헨리 5세가 극중극처럼 영화 내에서 연극 무대를 그대로 내보이며 시작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셰익스피어가 한창 활동하던 16세기에 영화라는 건 당연히 없었을 테고 실제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최근 출간되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책으로 접했을 때의 어색한 감정과 맞닿는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물이 아닌 한에는 대본집을 읽어가면서 각 인물들의 관계를 음미하는 게 내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영상으로 보는 게 - 더 나아가, 살아있는 배우들의 몸짓과 목소리로 보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재치있게도 이 작품은 무대를 고스란히 만들어서 그 앞에 자리하는 객석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위엄있는 교황과 신하들, 그리고 주인공인 헨리 5세까지도 무대 뒤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알수록 맛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알수록 '신비'가 사라지니까. 배역에 몰두하는 인물은 개인적인 면모를 없앨수록 그 배역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오히려 그 개인성이야말로 배역의 이미지를 해치는 정보인 것이다. 헌데 이 작품은 처음부터 틀을 깨고 - 아니 오히려 틀을 하나 더 만들어가면서까지 거추장스러운 연극을 선보인다. 그것도 등장할 때마다 박수에 반응하고, 관객에게 호응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배우들을 통해서 말이다.


무대 뒤편에 자리한 커튼으로 배경을 표현할 뿐이며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소품 투성이의 단 한칸짜리 무대. 그러나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에 몰입하며 중간중간 관객들을 웃기기 바쁘다. 대사를 다 못 외워서 난리를 피우는 교황도 있고, 시시때때로 인사를 건네는 왕도 있다. 관객이 웃으면 배우는 그걸 무시하는 게 아니라 더 해달라는 양 반응한다. 영국의 왕이 프랑스를 정복하려는 근엄한 대서사시인데도 이 극에 등장하는 배우부터 관객까지 그들의 행동은 마치 말 그대로 연극을 즐기는 것만 같다.


그러던 것이 헨리 5세가 본격적으로 프랑스를 향해 해협을 건너면서 모든 것이 충격적으로 달라진다. 한 칸짜리 연극무대, 그 뒤에 쳐진 화려한 그림 사이로 카메라가 줌인하더니 줌아웃 될 때에는 거대한 범선 위에 엄숙한 표정을 한 왕과 신하들이 자신들의 출정을 준비하고 있다. 드넓은 선박과 늘어선 물품, 화려한 색채가 만연한 공간은 도저히 이 곳이 가짜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전장의 시작부터 관객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다. 그때부터는 온전히 관람자인 나와 역사 속의 그들만이 남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프랑스 정복기. 아까 전 무대 위의 비좁은 영국 궁정과는 다르게 프랑스의 궁정은 제대로 모양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화려한 복식을 한 여유로운 귀족들은 전투력은 없어 보여도 귀족 특유의 우아함을 갖추고 있다. 넘쳐나는 공간을 제멋대로 사용하듯 각자 자리를 잡고 책임을 떠넘기며 으스대는 모습은 아까 전의 영국 궁정과 너무도 차이가 난다. 오직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은 무대 위에서도 카리스마가 넘쳤던 헨리 5세이다. 그런 그는 이제 광활하고 자유 무쌍한 카메라 워크에서 보여주는 저 멀리 흩어진 평야, 고풍스러운 마을을 누비며 정복기를 이어 나간다.


전장은 그야말로 굉장하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서로의 국가를 위시한 수많은 병사들이 진흙탕에서 얽히고설키며 넘어지는 장면은 한 편으론 허술해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매우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일제히 쏟아지는 화살, 넘어지는 이들을 뒤로 하고 전진하는 군사들에 기어코 프랑스군은 야비한 짓까지 벌이지만 패배하고야 만다. 위대한 영광과 함께 복귀한 이들 중에는 여전히 주책맞은 병사들도 있었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헨리 5세는 결국 프랑스의 캐서린과 사랑으로 맺어지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이 일관적이고도 평범한 영웅극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던 것은 위에 내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있다. 영화는 초반에 연극무대를 이용해서 극 자체의 시작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전장으로 향하는 시점부터는 끝없이 화려한 세트와 카메라샷을 사용해서 어느 순간 연극무대라는 장치를 완전히 없애버린다. 그 점 자체가 이 영화를 단순한 영웅극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굳이 먼 곳에서 가져오지 않아도 최근까지 나오는 영웅물이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이런 '가벼움'이다. 적어도 주인공의 영웅적 서사를 망칠법한 개인적인 모습이나 가벼운 느낌은 '신비감'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굉장한 전장 이전에 헨리 5세가 몰래 망토를 입고 자신의 병사들에게로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고 고뇌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병사들은 결코 이 전투에 대해 그만큼 위대한 뜻을 품지 않으며, 전쟁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목숨을 부지하기만 바랄 뿐이다. 자신을 이런 처지로 내몬 지도자인 왕을 원망하기도 하며 '이 모든 것은 그의 책임'이라 말하지만 헨리 5세는 그 자리에서 '영혼은 각자의 것이오.'라고 말한다. 사실상 이 답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 영혼의 주인이 각자의 것이라면 전투에 대한 선택도 스스로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 만일 전쟁을 치른 원인이 정당하지 않다면, 왕 스스로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 모든 신하는 왕에게 의무를 지지만, 각자의 영혼은 그 자신의 것이오.


하지만 이에 대한 답변도 없이 헨리 5세가 그다음 보이는 면모란 바로 지도자인 자신의 고뇌에 관한 것이다. '태양 아래 노예처럼 일하다 밤이 되면 천국이라는 꿈나라로 떠나는' 백성을 오히려 부러워하는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 되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백성에게 공감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마치 연극에서 앞서 적대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주인공의 고뇌를 더 깊이 있게 비춰서 '사실 주인공은 이토록 고뇌가 많은 자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왕은 얼마나 많은 마음의 평온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 평온을 평민은 마음껏 누리건만...(중략)
이 모든 왕권의 장식도,
누추한 노예가 누리는 깊은 잠 하나보다 나을 수 없도다.


사실 이 모습보다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극 후반부에 헨리가 캐서린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과 결혼하는 장면이었다. 헨리 5세는 전장 장면 이후에도 계속 이 영화 자체가 연극이라는 걸 강조하는 듯 강한 어조와 지절대는 듯한 말로 연극적인 연기를 지속하지만 프랑스 왕의 딸인 캐서린을 만난 뒤 그녀에게 다가갈 때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영화식 연기를 선보인다. 경직된 표정이 아닌 서툴게 헛웃음을 흘리거나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얼굴을 바라보는 여백의 연기, 서로 소리가 겹치며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불협화음은 그 어느 장면보다도 이 모습이 연극을 벗어난 것임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헨리의 반응을 바라보며 이 많은 백성을 이끌고 타국을 정복하며 이뤄낸 것이 결국 한 명의 여자로 좁혀지는 기분이 들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진다.


하지만 역시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바로 그 결혼식 장면이다. 전장씬과 캐서린에 대한 구혼씬이 다양한 카메라 샷과 클로즈업으로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연극임을 잊게 만드는 씬이었다면 결혼식 장면은 그야말로 다시 평면적인 구도로 돌아와 이것이 연극임을 다시 한번 알려주는 씬이기 때문이다. 캐서린과 단 둘이 사랑을 속삭이던 것도 잠시, 뒤에서 찾아온 모든 인물이 자연스레 그들을 - 그러나 다급히 - 허락해주고 바로 결혼식 복장을 한 이들이 수직으로 뒤편으로 넘어가 다시금 연극 무대 위에서 커튼 너머로 인사를 건네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미 나는 이 영화가 시작할 때 즈음에 지겨울 정도로 이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자연스럽게도 그들이 모두 '진짜'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탁월한 점은 바로 이런 점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은 이제까지도 무척 많을 것이다. 그만큼 연극으로도 만들어지는 경우 또한 많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영화로 만든 연극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감상하거나 논할 적에는 극 속의 내용을 다룬다. 등장인물이나 명대사나 서사적인 부분 말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것이 '연극'이라는 것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아니, 적어도 나는 이렇게 접근한 작품은 처음 봤다.


그동안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며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왜 자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쓰지 않는가? 어쩌면 자국의 이야기를 함부로 다뤘다가는 큰일이 날 것을 염려한 게 아닐까?'


하지만 헨리 5세는 분명히 잉글랜드의 이야기이고 특히나 영웅담이다. 문제는 이것이 연극으로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그것도 특히나 1944년의, 전쟁 중 영국의 일부 원조로 이루어진 - 영웅담을 위시한 프로파간다 영화라는 데에 있다. 올리비에 경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이야기는 그대로 들고 가면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능을 사용하여 의미를 비틀어버렸다. 영웅담 뒤의 모습은 이것이 가지고 있는 한 순간의 허무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한 편으로는 그 얄미운 셰익스피어가 커튼 뒤로 쏙 빠지며 이렇게 말하는 기분마저 느껴진다.


'어차피 이건 연극이잖아요?'


참으로 재치 있고 얄밉고 흥미로운 발언이다. 실제로 셰익스피어가 그것을 의도했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올리비에 경 버전의 헨리 5세가 탁월하다고 느낀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극을 자신의 방식대로 비틀어버렸다. 나는 이것이 '좋아함'의 끝이라고 본다. 맥락은 다르지만 데즈카 오사무의 '지상 최대의 로봇'을 근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추리 스릴러로 탈바꿈시켜버린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처럼. 극 자체를 보고 대단한 영웅담이라며 치켜세우는 사람도, 재미가 없다며 짜증을 내는 관중도, 지금처럼 저런 정치적인 영웅이 있나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도 결국 모두 셰익스피어 앞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진행되면 급기야 올리비에 경과 그들의 연기에 속아 넘어간 우리가 광대가 된 기분이다. 되려 그들이 관람자인 우리의 반응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 와중에도 아름다운 미장센과 연출로 영화적인 장점을 챙겨가며 - 실제로 나는 보는 내내 헬로 돌리가 생각났다. 내게 있어서 헬로 돌리란 고전 영화 중 가장 시각적으로 화려한 영화이다. -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토록 세련되게 전하는 작품은 또 처음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찾아보고자 가볍게 시작한 마음이 도리어 또 한 명의 위대한 창작자를 만나게 한 것 같아 당황스러우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마음이 뜨거워진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재창조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가끔 어떤 것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지 않던가. 어떤 것을 선호한다는 것은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기간을 지나 그것의 단점과 약점을 파고들고 머지않아 그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찾아내 자신만의 재해석을 덧붙이는 과정을 거치는 멋진 여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리비에 경의 햄릿 5세는 그런 점에서 셰익스피어보다 그 자신의 특성이 짙게 드러난 작품이다. 오히려 그토록 장난기 넘치는 셰익스피어를 이용하여 자신을 훌륭하게 드러낸 이 작품을 통해 '좋아함'이란 무엇인지, 재해석과 재창조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고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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