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 때, 엄마를 떠나보낸 기억이 있다. 아빠는 외도를 했고,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때 아빠의 여자 친구와 함께 살게 되었고, 그녀는 하루아침에 내 엄마 노릇을 하게 되었다. 아빠의 여자 친구는 컴퓨터로 화투 게임을 할 때가 아니면 잘 웃지 않고, 내 시험 성적이 떨어진 것에는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랑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채, 금세 웃음과 삶의 희망을 잃어갔다.
만약 그때의 나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면, 빨강머리 앤과 친구가 되게 해 주고 싶다. 앤은 고아였고, 남자아이가 입양되기로 했던 집에 잘못 입양된 아이였다. 나는 앤의 이야기 속에서, 앤이 불쌍하게 느껴질 때마다, 내가 태어나던 날 아무도 나를 환영하지 않았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처음 입양된 날, 여자아이는 필요 없다던 마릴라의 말이 가슴에 콕 박힌 이유다.
나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여자아이는 필요 없다는 말, 심지어는 내 이름의 한자도 나를 위한 뜻이 아니라 남자 동생을 낳으라는 뜻으로 지었다는 말을 들었다. 경상도 토박이 집안이라 더 보수적이었을지도 모르고, 아들을 그토록 원했던 집에 태어난 둘째 딸이었으니까 그랬겠지만, 나는 태어났을 뿐인데, 태어나자마자 미움 받는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엄마는 우리 집 어른들이 이상한 거라고, 그렇지만 엄마는 내 탄생이 누구보다도 기쁘고 행복했다며 나를 안아 주는 사람이었다. 나를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나는 슬픔에 대해서 열한 살 나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나에게 오랫동안 또 다른 슬픔이 되었다. 떠나는 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다시 눈물이 났다. 어른이 된 어느 날에는 차가운 의자에 앉아서 십사 년 만에 생각난 오리 그림 팬티 때문에 엉엉 울었다. 엄마가 나를 떠나가던 날 선물해 주었던 팬티와 팬티에 그려져 있던 오리 그림, 이 그림은 오리가 아니라 병아리야, 하면서 언니가 나를 놀렸던 기억, 그러나 그 엉성하게 생긴 부리와 날개가 꼭 오리 같아서 나는 오리라고 이야기했던 팬티가 생각났다. 엄마가 내 작은 손에 쥐어준 팬티를 떠올리면 팬티의 조용한 감촉이 느껴지고 나를 떠나던 엄마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엄마는 높은 통 굽 샌들을 신고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다.
앤도 사랑 받지 못했던 기억을 깊은 상처로 여겼다. 그래서 슬픈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부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앤은 이름을 붙이곤 했다. 이층 방 창문을 열면 보이는 벚나무에게 ‘눈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창턱에 있는 사과향 제라늄에게 ‘보니’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마릴라가 그게 도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할 때면 마릴라 당신도 아주머니라고 불리면 삶이 지루할 것 같지 않냐고 하면서 꿋꿋하게 이름을 지었다. 학교 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풀들에게 이름을 지을 것처럼 매일 어루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살았다. 내일이면 떠나야 할 집에서도, 벚나무를 벚나무 대신 눈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이름을 붙이는 앤은 세상의 주인이 된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어떤 계절이나 꽃이나 내리는 눈도 모두 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그럴 때는 정말 앤이 동화 속 주인공처럼 보였다.
우리 모녀는, 그 이별로부터 사 년 후, 다시 같이 살게 되었다. 엄마는 혼자서 나와 언니를 키울 아파트를 마련하느라 잠을 잘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일해야 하는 상태였고, 나는 오랜만에 본 엄마가 왜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됐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단지 같이 사는 것만을 바래 오느라 내 마음을 알 길이 없었던 엄마는, 사 년 동안 우리의 관계가 변해버렸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나와 어떻게 지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울었다. 그렇게, 엄마와 다시 함께 살게 됐을 때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슬픔이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것이 이뤄지고서도 슬펐을 때는 어떻게 하면 슬프지 않을 수 있는지 방법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만약 앤이 그런 일을 겪었다면,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폭발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슬픔을 표현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는 것으로 무언가가 달라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앤이 사물에 이름을 붙이던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괜찮아지는 감정이 있다. 그래서 앤이 말하고 나면 내가 괜찮아지는 것 같을 때가 있었고, 앤의 말은 내 안에 무언가 답답한 것이 올라올 때, 나를 깨우는 기분을 느끼게 할 때가 있었다.
오십이 넘은 우리 엄마는 요즘 상담을 받는다. 할머니에게 미움밖에 못 받은 줄 알았던 엄마가, 상담을 받다 보니 그 옛날 할머니의 말투가 생각난다며 울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며 울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할머니는 나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울었다. 길을 걷다가 눈물을 흘리고, 자신이 불쌍하다고 말하는 엄마를 보면서, 언젠가 남편에게 다행이라고, 너무 다행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슬픈 것은 슬픈 것이지만, 슬픈 것을 얼마나 슬프다고, 어떻게 슬프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고 소중한 일일 때가 있다.
이제는 나도 가정을 이뤘고 아이를 낳았다. 또 우리 엄마와는 멀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으니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엄마가 주말이면 우리 집으로 놀러 온다. 같이 저녁을 먹을 때가 많은데, 가만히 엄마를 보고 있으면 무언가를 말하기보다, 안고 울고 싶고, 만지고 싶을 때가 있다. 손을 잡고 싶고, 주름을 만지고 싶고, 짙게 그린 눈썹이 지워질 정도로 얼굴을 만지고 싶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만히 느끼는 것이 우리를 위해 하는 기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울지 않았던 것이 더 슬프다고 말하던 엄마의 눈과 젖어 있던 속눈썹을 기억한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내가 뒤를 돌아 아파트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던 모습이 가슴에 영화 속 장면처럼 남아 잊기 힘들다고 했던 엄마의 마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엄마와 내 마음속에는 각기 다른 영화가 상영되고 있고, 내가 열한 살이던 그 시절 아무리 울었대도 엄마의 슬픔을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없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슬픔을 쌓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추억처럼 쌓이는 것이 슬픔이고, 그래서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데도, 엄마가 급하게 밥을 먹는 모습이 속에 얹힌 것처럼 남아서, 남편에게 엄마를 본 날이면 속상해,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이제 엄마가 떠나던 날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내가 몰랐던 슬픔을 여전히 모를 수도 있고,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젠가 다시 헤어지게 된다면 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그저 엉엉 울 것이다. 부둥켜안고, 그저, 엄마의 얼굴을 만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울지 않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믿었던 때를 지나, 더 잘 우는 연습을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