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 뿌리내리기 위한 지난한 여정
뿌리 내리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게 낯선 곳이라면 더더욱.
아무데서나 잘 자란다는 미나리
그저 그런 미나리처럼
아무렇게나 심겨
그 곳에서 자라나면
그러면 나는,
그곳으로부터
나의 땅을 부여받게 되는 걸까
그 곳에서 마음 껏 자라도 되는 걸까
원하든 원치않든 자라나면 그만인걸까
다른 장면은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는데
데이빗이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
엄마아빠 몰래 잔디밭을 뛰어가는 장면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헥, 헥 거리면서 한 발 한 발 내딛는 잔디
그 장면을 보는데 나는 너무 조마조마하고 애처로워
숨 죽이고 지켜봤다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처럼 숭고하게 느껴졌던
그 뜀박질이
영화 미나리가 내게 남긴 정서 전체를 뒤흔들만큼
임팩트 있었다
아역들의 연기가 극에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스티븐연과 윤여정은 역시,
말할 것도 없다
공들여 농사지은 농작물이 있던
창고가 불에 타고
정신없이 그걸 진압하다 나란히 잠든 가족의 얼굴을
관객의 시점으로 내려다보면서
나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박수를 쳤었다
그들을 응원했다
하지만 그건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창고가 불에 탈 때
안타깝고 당황스럽기보다
속이 시원했는지 모르겠다
인생은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참 많다
그리고 어쩜 그렇게
'공교롭게도', '공교로운' 일들이 그리도
잘 겹칠 수 있는지,
참 놀라울 따름이다
지난한 여정이 예상되지만
그 '지난함'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척박함,
고단한 삶의 애환처럼 다가오기 보다는
어떠한 '생명력'으로 느껴졌다
힘들 수 있다는 건
아직 뭐든 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물이 흐르는 땅의 스팟을 찾기 위해
영 내키지 않는 수맥을 동원하는 제이콥을 보면서
인생은 저런 게 아닌가,
그래서 '미나리 같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서서히
뿌리내리다
주변과 하나가 되고
나에게 주어진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게 보편적인 인생사 아닐까
그 지난한 여정을 미나리처럼 견디는 것이
그저 그렇게 땅의 양분을 흡수하며
내 살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전부인 것
누구에게나 진행 중일 지난한 여정
결과는 시시할지언정
과정은 결코 시시하지 않은,
나름의 치열함과 숭고함을 지니고 있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없는
그 시시하지만 위대한 보편성
내 인생은
얼마만큼 뿌리내리고 있을까,
그 뿌리가 언제쯤 견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