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 김승옥,『무진기행』
그곳에 하인숙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나’는 ‘무진’에 머무를 수 없었다. ‘무진’은 나에게 어떠한 ‘장소’라는 공간적 속성을 지닌 곳이라기보다는 “어둡던 나의 청년”으로 표상되는 ‘나 자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문득 한적(閑寂)이 그리울 때도 나는 무진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의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
인용문에서처럼 그곳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고 표현한 것 역시 ‘나’의 관념 속에서의 무진이 장소라기보다는 ‘나’로 표상되는 어떠한 상징성을 지닌 곳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무진으로의 기행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볼 수 있다.
‘나’에게 ‘무진’이란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가는 곳으로, 무진에 간다고 해서 “새로운 용기라든가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처박혀 있는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적’이 그리울 때도 문득 무진을 생각할 만큼 그것은 ‘나’의 관념 속, 혹은 무의식 속에 제법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나’의 무의식은 바다를 부유하는 부표처럼 둥둥 떠다니다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반수면 상태’에 빠지게 되고, 이 ‘반수면 상태’는 사실상 ‘나’가 무진에 있는 동안 지속된다.
턱이 덜그럭거릴 정도로 몸에서 힘을 빼고 버스를 타고 있으면,[……]유월의 바람이 나를 반수면 상태로 끌어넣었기 때문에 나는 힘을 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햇빛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나’는 잠이 든 것도 그렇다고 온전히 깨어있는 것도 아닌 ‘반수면 상태’에서 머릿속에서 시답잖은 수면제 조합이나 생각하며 밀려오는 ‘엉뚱한 공상들’을 그저 흐르게 내버려둔다. 이렇듯 ‘나’는 무진에 가기만하면 엉뚱한 공상들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하곤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끄럼 없이’라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나’는 무진을 떠남과 동시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렘수면 상태에 빠진 ‘나’는 내 젊은 날의 초상, 그 민낯이 남아 있는 무진에서 ‘나’의 얼룩진 과거와 상처를 마주하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그곳에서 ‘나’는 렘수면의 기운을 빌려 기꺼이 민낯과 조우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상태가 공존하는 ‘렘수면 상태’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민낯을 숨기고 가면을 써야하는 ‘서울’로 가는 순간, 나는 ‘부끄러움’ 따위를 느끼는 것이다. 엉뚱한 공상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 그곳으로 가는 순간 ‘나’는 주섬주섬 ‘나’의 민낯을 가리려 가면을 쓰고는 가면 뒤에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당신 안색이 아주 나빠져서 큰일 났어요. 어머님의 산소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무진에 며칠 동안 계시다가 오세요. 주주총회에서의 일은 아버지하고 저하고 다 꾸며 놓을게요. 당신은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쐬고 그리고 돌아와 보면 대회생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되어 잇을 게 아니에요?”라고 며칠 전날 밤, 아내가 나의 파자마 깃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진심에서 나온 권유를 했을 때 가기 싫은 심부름을 억지로 갈 때 아이들이 불평을 하듯이 내가 몇 마디 입안엣 소리로 투덜댄 것도 무진에서는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과거의 경험에 의한 조건반사였었다.
한 편 이번 무진행이 ‘자발적’인 기행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그의 결말은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내가 허락해준 범위 내에서만 무진에 머무를 것이며, 아내의 부름에 가기 싫은 심부름이든 아니든 어쨌든 심부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처럼 적잖이 늦지 않도록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성이 결여된 여행, 렘수면 상태에서 깨어나면 돌아가야 할 여행, 어떠한 ‘장소’로의 여행이 아닌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그곳에 어떠한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하인숙은 없을 것이다.
역시나 무진에 하인숙은 없었다.
무진의 명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안개’는 ‘나’가 가진 ‘모호성’과 맞닿아 있다. ‘나’는 자기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는 않는 성격으로 그려진다. 어머니가 나를 골방에 가두는 동안 적절히 그 상태를 지속하면서도 원망하며 수음이나 하고, 아내와 장인어른이 두발 벗고 나서 나를 전무로 만들기 위해 힘쓰는 동안 적당히 무진에서 “신선한 공기를 쐬고 돌아와 보면” 되는 것이었다. 이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은 ‘어머니’가, ‘아내와 장인어른’이 나를 위해 적극적으로 두 발 벗고 나서주었기 때문에 비로소 ‘나’가 부담해야할 것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괴로운 척’, 자기도 퍽이나 ‘고민한 척’만 해주면 어떠한 죄의식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나는 적극적인 인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반투명성’은 무진의 ‘안개’의 이미지와 상응한다. 완전히 순수하여 투명하지도, 그렇다고 타락하여 불투명하지도 않은 ‘반투명’의 상태가 ‘나’의 정체성인 것이다. 이는 ‘조’와 ‘박’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하인숙의 이중성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인숙은 순수한 ‘박’의 사랑을 경멸하고 조롱하면서도 세속적으로 부를 획득한 ‘조’에게 신분상승을 해보려는 계기로 접근하지만 자신을 다 주지는 않는, 그러면서도 ‘서울 냄새’가 나는 ‘나’를 갈망하면서 ‘순수한 사랑을 맹세’하는 모호함을 보인다. 사랑에 있어서 그녀의 태도는 완벽하게 순수하지도 그렇다고 철저히 속물적이지도 않은 ‘반투명성’ 즉, 모순되는 이중적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이렇듯 무진의 속성은 ‘나’뿐만 아니라 하인숙과도 맞닿아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희뿌연 안개처럼, 하인숙은 바로 윤희중 ‘자기 자신’이기에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안개는 멀리서 보면 뿌옇게 보이지만 막상 그 안개 속으로 들어가면, 안개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 하인숙도 그런 존재인 것이다. 조금 떨어져서는 그녀가 존재한다고 생각되지만, 그녀를 깊게 알고 그녀의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존재를 느낄 수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하인숙은 주체성을 가진 자율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나’의 자아탐색의 도정에서 이를 인도하고 주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욕망의 대상이 되거나 자아성찰을 촉발시키는 촉매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하인숙에게서 강한 동질감을 느끼며 거의 자신과 동일시한다. 순수성과 속물성을 동시에 지니는 모호성, 그것을 가진 인물이 바로 하인숙이며 윤희중 ‘나’자신이다. 둘은 ‘위선적’이라는 것에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낀다. 자신들의 속물성을 ‘위조’하는 것, 그 자체로서 조우하는 것이다.
반드시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돈 많은 과부’를 만난 것이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윤희중과 그를 사랑하지 않지만 적잖이 신분상승을 바라는 맘으로 ‘조’의 집에서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고 있는 하인숙의 속물성은 결코 다르지 않다. 하인숙은 순수했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무진을 탈피하기를 갈망하는 ‘과거의 나’이기도 하고, 적절한 속물성을 체득하여 현실과 타협하고자 하는 ‘현재의 나’이기도 하다. 하인숙은 ‘나의 분신’이자 ‘자의식의 편린’이기에 ‘과거의 나의 분신’이라든가 ‘현재의 나의 분신’등으로 극명하게 나뉘는 속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연속선상에 놓임과 동시에 단절된 일종의 ‘조각들’인 것이다.
하인숙은 “자기 자신이 싫어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으세요?”라고 묻는다. 윤희중은 속물적인 자신이 싫어지려던 참이다. 하인숙은 결국 윤희중의 의식 속에서 자문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하인숙의 대사는 윤희중의 대사인 것이다. 무진에 있는 동안만 “멋있는 연애”를 할 거라는 그녀의 말은 서울로 그녀를 데려갈 리 없는 윤희중의 자의식과 마주한다. 결국 하인숙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나 자신과의 갈등인 것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개인 간의 외적갈등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각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내적갈등’에 더 가깝다. 윤희중은 하인숙에게서 자신에게 있는 속성인 허무와 불안을 느끼고, 이에 동질감을 느껴 그녀와 관계를 가지지만 그녀가 가지는 일종의 주체적 욕망에 두려움을 느낀다. 하인숙이 욕망을 철회하고 순수한 사랑을 갈망한다고 해석하는 부분도 있으나 오히려 정 반대이다. 일주일간만 멋진 연애를 하겠다는 그녀의 선택 역시 지극히 현실적인 결정인 것이다.
‘무진기행’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점은 윤희중이 세속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빚어낸 소외와 물질만능주의 풍조는 이미 현대적 개인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고 주인공들은 이에 순응하면 순응했지,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 체계 속에서 한사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소외되려고 하진 않지만, 자기기만적 소외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들 그렇기에 나 자신만이 유별나지도, 덕분에 초라해지지도 않는다. 다만 조금은 씁쓸할 뿐이다. 이렇듯 어떠한 적극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윤희중은 충분히 자본주의의 속물성에 젖을 대로 젖은 현대적 개인임에 틀림없다.
‘나’는 혼돈과 무책임이 난무하는 무진보다는 어느새 책임, 또 책임만을 요구하는 서울에 더 길들여져 있다. 전근대적인 속성과 비합리성, 촌스러움의 비릿한 냄새를 맡느니 비록 조금은 인간성이 결여되어있다 할지라도 합리적이고 세련된 근대적 공간인 서울에서 머리 아픈 향수 냄새에 취해버리는 것이 나은 편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그는 하인숙을 서울로 데려가지도 않을뿐더러, 어떠한 ‘순수한 사랑’내지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하인숙을 만나지 않은 것이다. 단지 ‘자신의 또 다른 자화상’을 만났을 뿐이다.
하인숙은 없다.
윤희중은 애초에 자신의 일상적 욕망과 그 틀로부터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하인숙을 서울에 데려갈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철저히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는 ‘속물성’이 내재된 인물이었으므로 애초에 하인숙의 존재는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울에 데려가 달라는 그녀의 욕망에 그가 알겠다고 대답했던 것은, 단지 ‘귀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서울과 무진의 공간을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하인숙을 보면서 윤희중은 더욱더 그녀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리라. 일상과 탈일상을 구분 지으려 드는 주체적이면서도 타성적인 ‘이중적’인 그녀를 보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일종의 염증을 느꼈으리라. 그는 애초에 그녀와 함께하면서도 함께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나'의 결정에 대한 알리바이는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이라는 말 속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다. '나'는 "감상이나 연민으로써 세상을 향하고 사는 나이도 지난” 지극히 속물적이고 현실적인, 퍽이나 세련된 ‘서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무게 중심의 축은 언제나 서울에 있었다. ‘나’를 찾으러 간 무진에서 ‘나’는 하인숙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혼란과 불안 그리고 설렘이 혼재된, 그리고 그것들이 마구 뒤섞여 엉켜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과거의 상처와 기억을 되새기며 ‘서울’에서의 정제된 자신이 조금은 더 만족스러운 상태임을, 순수보다는 합리가, 낭만보다는 현실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을 뿐이다.
아내의 전보를 받고 마치 최면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서둘러 서울 상경을 준비하는, 양심에 찔려 어차피 찢어버릴 부질없는 편지 한 통을 쓰곤 기꺼이 그것을 찢어버리고 마는, 윤희중이 있다. 그토록 얕으며 절실하지 못했고, 현실의 벽에 처참히 무너져버릴 위태로운 합판 벽 같았던 사랑은,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로 편입되지 못하고 어설픈 ‘서울 사람’으로 살아갈 채비를 마치는 것이다. 여전히 어쭙잖은 얼굴을 하고서.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사랑하고 있는’ 그 예전의 자의식의 편린을 그렇게 렘수면 상태에 내팽겨 쳐버리고 의식의 기저에 흐르도록 둔 채 ‘책임’만 요구하는 그 사회로 냉큼 떠나버린다. 당연하다는 듯이, 어차피 그럴 것이었다는 듯이, 하지만 ‘아쉬운 척’, ‘어쩔 수 없었다는 척’을 있는 대로 하는 것을 잊지 않고서.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팻말을 보는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그에게 ‘당신은 순수했던 자신과,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욕망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당신으로부터 탈피하고 있습니다.’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이 ‘선택’했으므로 그에 합당한 ‘책임’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제 제법 ‘도시인’이 되었음을, 또 다시 기꺼이 ‘서울 사람’이 되러 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속물성과 일종의 타락을 재차 확인시켜주며 '부끄러움'의 정서로 귀결되는 것이다. 썩 마음에 내키진 않지만, 또 영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아닌 자아를 ‘책임’지기 위해 딱 그만큼의 ‘정량’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는 서울로 향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정량의 부끄러움’을 ‘심한 부끄러움’이라 포장하며 자위한다.
무진은 애초에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말처럼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이 아닌, 나 역시 ‘속물’임을 재확인하는, 그렇게 어쭙잖게 근대성에 반 쯤 길들여진 나의 생생한 민낯을 마주하는 조금은 불편한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불현 듯 어쩌면 필연적인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하인숙은 나의 ‘분신’이자 토막 난 나의 과거 ‘자의식의 편린’이자 감추고 싶었으나 끝내 직면해버린 ‘또 다른 자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인숙은 없다. 그곳엔 어쭙잖은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나’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