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책 및 영상 기록

by 물결


(음악을 튼 스티븐스의 방안에서)
벤: 방을 정말 아늑하게 꾸미셨군요. 일에 매우 만족하시는 것 같더군요.
스티븐스: 벤씨, 난 만족이라는 건 최선을 다해서 주인님을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부'나 '계급'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훌륭할 때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벤: 당신 생각에는 저 사람들이 도덕적인 거 같습니까? (중얼거리듯이) 잘은 모르겠지만 (스티븐스를 똑바로 보며) 아닌 것 같습니다. 듣자니 이상한 말들을 하더군요.
스티븐스: 전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들어봐요.
벤: (스티븐스를 가만히 응시한다.)
스티븐스: 정말 감미롭죠? 만약 손님들의 대화를 듣는다면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될 거요.

「남아 있는 나날」, 영화 속 대화 중에서


스티븐스는 삶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때로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서 파생되고 있는 현재의 결과를 똑똑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혹은, 지속되는 평화로운 자신의 일을 반복하며 잔인하고, 끔찍한 현재와 현실을 바라보지 않으리라고 노력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의 행동의 종점은 나치를 위한 암묵적인 동조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것은 마치 과거 달린턴 경이 젊은 손님에게 자연적인 경관에 대해 논하며 시간을 끌라고 하였던 것과 맞닿는다. 영화에서 그는 말을 거는 목적-시간을 끌려는 것-을 잊으려 애쓰며, 자연에 대해 찬미하려 노력한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될 책임의 목적지에 대해 묻지 않고, 쉴틈 없이 주어지는 달링턴 경의 주문서와 같은 길가의 꽃에게 열심히 경의를 표하며 나아간다. 그는 무슨 일이든 하나도 빠짐없이 해내고야 마는 유능한 집사이자 하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정당하다. 예수의 출현은 유대인에게 불가사의하고 증오스러운 것이었다. 예수도 그들 가운데서 자랐지만 유대인의 본질을 부정했다. 우리보다 유대인이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하다. 유럽인들과 유대인 사이에 생겨난 이 깊은 골은 결코 위험한 선입견에서 기인한 종교적 편견은 아니며, 우리와 그들 간에 다른 점이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뿐이다.”

「남아 있는 나날」, 영화 중에서


“내가 쭉 생각해 보았네, 스티븐스. 많이 생각해 봤어. 그리고 결론에 도달했네. 우리 달링턴 홀에 유대인 직원을 줄 수는 없네.”
“예?”
“이 집의 평안을 위해서일세. 스티븐스. 여기 묵고 계시는 손님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내가 신중하게 검토하고 결론을 알려주는 걸세, 스티븐스.”
“잘 알겠습니다, 나리.”
“아, 그렇군.”
나리는 잠시 입을 다물고 창밖을 응시하셨다.
“물론 그 사람들도 내보내야 할걸세.”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안타깝지만 달리 방법이 없네. 네 손님들의 안전과 평안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분명히 말하지만 철저하게 검토하고 생각해본 사안일세, 이 모두가 우리를 위한 일이야.”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송은경 옮김, 민음사, 2009, p.180.


"이 모두가 우리를 위한 일". 공동을 위해서 한다는 일은 대단한 책임감이 부여된다. 그리고 그것인 정말로 '공동'을 대변하는가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 스티븐스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사회에서 평범한 한 사람이다. 이 대화처럼 짙은 공손여린 말, 예의에 숨겨진 차별은 구분해내기가 참 어렵다. 이미 "철저하게 검토하고 생각해본 사안"은 더욱 이의 제기를 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최근 들은 한 강의에서는 우리 사회가 보수의 물결이 짙다고 하였다. (지금은 코로나로 얌전해졌지만) 광화문만 가면 가까운 곳은 물론, 보이지 않는 저 너머까지 고막의 찢어짐을 선사하는 태극기 집회가 있다. 이들이 얼마나 우리 한국 사회의 후퇴를 부르짓고 있는지, 자신이 정당하다고 우기며 무수한 사람들을 얼마나 상처 입히고 있는지, 성조기과 태극기를 흔들며 우리를 얼마나 분열시키고 있는지, 빨갱이와 종북 좌파를 언급하며 통일로 나아가는 길을 얼마나 저해하고 있는지, 공동체를 파멸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극과 극의 현상의 사이에서 나는 그들이 우리 곁의 할머니 할아버지이고, 그들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한 사람이라는 점을 안다. 그래서, 이 현상을 서울에 올라온 나의 외국인 친구들에게 설명하는 것 또한 무척 어려웠다. 내 속에서 다듬어지지 않고, 섞여지지 않는 사상을 전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라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스티븐스의 모습은 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그리고리와 닮았다. 이의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이 '자식(子 스메르자코프)'과 '역사'라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지만 그리고리 또한 스케르자코프를 진정한 괴물로 만든 데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평소의 스티븐스의 모습처럼 그리고리도 겉보기에 악과는 상관없는 다소 현실적인 인물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소설 속에서 가장 은밀하고 거대한 악을 구현한다. 그리고리는 신앙심을 깊고 스스로 확고한 진리라고 판명해 절대 뒷걸음치지 않는,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스티븐스 또한 달링턴 경에 대한 충실한 정과 성실을 확고하게 믿으며 “항상 일하고, 일하며, 앞으로도” 그러하다. 두 분 모두 주인의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지내온, 공인하는 정직한 사람인 것이다.


(자동차 밖으로 나와서)
리처드 칼라일 박사: 당신은 그 사람의 의견에 공감하셨나요?
스티븐스: 누구요?
리처드 칼라일 박사: 달링턴 경 말입니다.
스티븐스: 전 집사였을 뿐입니다. 시중을 들 뿐 의견을 피력하진 않았습니다.
리처드 칼라일 박사: 그를 신뢰했군요.
스티븐스: 네, 전적으로요. 하지만 말년에 가서 달링턴 경은 독일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고 후회하셨습니다.
리처드 칼라일 박사: 그렇군요.
(…)
리처드 칼라일 박사: 죄송하지만 호기심이 동해서 그러는데 달링턴 경의 행동을 어떻게 보십니까? 당신이라면 실수하지 않았을까요? 지나쳤다면 용서하세요.
스티븐스: 괜찮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저도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온 것 같아서 다시 바로 잡으려고 가는 길입니다. (시동을 건다.)

「남아 있는 나날」, 영화 속 대화 중에서


스티븐스의 삶은 선과 공익, 달링턴 경에게 대한 아름다운 복종으로 점철된 인생으로 보여지지만 결국 그의 행동은 악의 모습이 되었다. 그는 악을 구현하고야 만다. 현실에 충실한 한 인간의 삶이 몸담은 사회에 강력히 결탁되고 연결된다. 우리는 이 점을 경계하고 삶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 발전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출 수 없다. 내가 몰라서 누군가에게 행하는 차별과 말과 행동의 잘못을 0에 가깝게 줄이고 싶다. 모든 인간은 모났거나, 세세하거나, 균일하거나 다수의 모양과 다른 모양을 가졌더라도 존중받아야 한다. 또한, 그 모든 사람은 그 모양에 따라 손가락질 당하지지 않아야 하고, 그 존재 자체로 마땅히 존귀하다. 모든 사람들이 자아내고 낳아낸 영향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유유히 영원하게 나아가고 있다.



「남아 있는 나날」, 영화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송은경 옮김, 민음사, 2009.



202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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