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을 약속하고 싶다면

bachelor‘s writing-22살의 기록

by 물결


1. 모두의 세상


당신은 어떤 세상을 살고 싶은가요. 모두가 이롭게 세상을 살려면 어떻게 지내야 하나요. 저는 젊음을 만끽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싱그럽게 피어나 있는 산과 들에게 기쁨을 받아요. 슈마허 대학, 오르빌, 유학 등 속삭이는 나의 꿈들과 대학교의 공부, 환경, 관계, 미래, 직업, 모든 것에 시간을 들이고 모든 것을 준비하는 단계여서 시간을 들일 것이 너무 많아요. 세상엔 아름다움의 빛깔이 너무나 다채로워서 시간을 빼앗길 것도, 소요할 것도 너무 많은걸요.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의 삶은 자연적 토대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허황된 것, 이루어지지 않을 꿈에 불과해요. 어쩌다 자본의 토대에서는 우리의 존엄은 상실되고, 이윤 앞에선 그 모든 것도 무력해지는 걸까 생각하곤 합니다. (수업의 토론 중 경호님이 말씀하신) “안전 불감증은 자본의 기본 전제”란 말을 계속 곱씹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도스토옙스키, 바흐친의 인간관1**이 떠올랐어요. 안전처럼 세는 것이 불가한 인간 존엄을 세어지는 것-돈, 이윤, 이익, 점수-것으로 환원하는 속성이 깊이 파고든 인간의 ‘물질화’에서 자연파괴는 자연스러워요. 그것은 돈이고, 지금의 연료일 뿐이지 생명과 내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것임을 망각해버립니다. 항상 내 선에서의 위험을 책임질 수 만큼만 사는 것이 옳아요. 내 선에서 더더욱 내 나라에서 세계에서 감수할 수도 없으면서, 지속할 수 있다고 강행하는 것은 자손들을 차례차례 잔인하게 죽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2. 꼭 알아야만 하는 것 -기본적인 전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은 이와 같아요. “지구를 살리기 위해 텀블러를 챙기렴, 천가방을 가지고 다니렴.” 지속해서 들어온 혼자 차원의 환경 챙기기에서 우리는 망각하지 말아야 해요.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해 있던 구조적인 오염 시스템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해요. 단단히 환경 불평등과 환경 정의론를 우리 안으로 뿌리 내려야 해요. 오염은 불평등에 야금야금 먹으며 기인했어요. 인종차별주의가 환경 불평등으로 나타나며 그 피해나 시설이 이상하게도-혹은 의도적으로- 사회 약자인 유색인종에게 집중이 되었고, 환경 정의 운동은 흑인의 민권운동1*과 결합하며 러브커넬 사건, 노스우드 매너 사건, 웨렌 카우디 사건, 댈러스 사건 등으로 정의 운동이 확산했어요. 이는 3단계로 전개되며 1단계, 1982년 님비를 나이비2*로 반박하고, 2단계에는 (1991년) 최초의 전국 유색 인종 환경 리더십 회의를 기점으로 풀뿌리 연대 조직을 결정하게 되며 환경 정의 운동이 확산되고, 3단계에서는 오염시설의 ‘공정’한 입지를 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공해’ 시설 자체에 대해 폐기 및 생태친화적인 생산을 요구하는 경향이 시작되어요. 그리하여 공해 밀집지역에서 시작된 환경저의 운동은 미국 전 지역으로 국제사회의 영향을 미치게 되어 유엔 환경개발회의,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기간에 출범한 기후 정의 네트워크3* 등으로 연대하게 됩니다. 이처럼 기후변화가 인간 사회에 동일하게 영향을 끼치지 않고 지리적 위치나 경제적 여력 등에 따라 대응 역량에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기후 정의는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요. 그렇게 흘러 환경 정의 운동은 기후 정의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어요.

결국 브라이언트는 환경 인종주의, 환경 불의, 환경 정의를 정리하여요. 환경 인종주의는 말 그대로 인종주의의 확장이에요. 이것은 초기의 독극물과 위험폐기물로부터의 보호에 관한 불평등이며 결정권으로부터 계획적으로 유색인을 배제해요. 문제를 확인하고 증명하는데 기초를 두었지요. 환경불의는 환경질과 위계 조직 사이의 교차점과 사회불평등 권력과 사회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와 환경 부담에 구조적인 질문을 설명해요. 특정 사회집단이 짊어지고 있는 환경 위험의 모두를 포함합니다. 이 환경 불의는 인종, 종교, 윤리적 집단 포함해 특정 사회집단이 환경 위험을 짊어지고 있을 때 발생하지요. 즉, 환경 인종주의는 사회운동이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대상이고, 그들이 싸우는 목표는 환경정의가 되어요. 환경정의는 모든 사람들이 인종, 민족, 소득수준과 관계 없이 환경법, 규제, 정책의 개발, 이행 및 집행에서 공정한 대우와 의미 있는 참여를 하는 것이에요. 이는 모두가 동등한 접근권을 가질 때에 달성이 되지요. 이에서 나아가 자본주의적 불평등과 환경 불평등은 성, 환경, 건강, 교육, 주거 등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착취하는 자(자본가)와 착취당하는 자(노동자)로 나누어 이용과정과 관리 과정의 계급 기반이 환경 개선에 따른 편익, 비용에 있어서 계급적 선택성을 발생한다고 합니다. 결국, 자연도 인간에게 관계할 때에 인간의 사회적이나 역사적인 생산활동에 의해서 매개가 가능한데 자본주의의 관계에서는 생산자와 노동자가 생산 필요한 필수적 자연 조건으로부터 사회적 분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분리로부터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의 균열을 가져오게 되어요. 결국 환경 불평등을 설명하는 기존 논의는 계층관점-> 계급관점-> 자본 관계의 총체성 관점4*으로 제시되게 되어요. 이 상황에서 인간이 모든 문제해결의 중심이며, 미래세대를 배려하는 개념에 기초한 지속가능 발전이라는 말이 부룬트란트 보고서(1987)5*를 통해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서서히 대두가 되어요. 기업에서도 남용이 되는 이 ‘지속가능발전’이란 말은 발전이 이루어지되 환경용량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에요. ‘환경을 제약조건으로 한 발전’인 것이에요. 오염, 개발도상국에서의 폭발적 인구증가, 핵무기 개발에 따르는 인간 사회의 파괴 등 인류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했고 이는 6월에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제 1회 총회에 제출되었고, 멀지 않은 미래에 가용한 부존자원의 양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것이라는 비관적 예측결과를 제시하게 되어요. ‘한계’로부터 ‘지속가능’으로 인류의 전망을 이전하는 이 개념은 1970년대부터 유엔 회의, 세계보전전략등에 끊임없이 제기되고 리우선언과 의제 21을 통해 선언적 지침과 실천계획과 행동계획을 포함하게 되어요. 결국 이는 경제성장을 멈추자는 것이 아닌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 유지와 관련된 것으로 폭넓게 해석하는 경향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에요. 환경파괴, 사회갈등을 일으키는 경제성장이 아닌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총합과 환경보전을 함께 이루어가는 미래지향적 발전을 의미해요. 지속가능한 발전이 허공에 흩어지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들이 많아 보이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글을 읽다보면 자본주의와 환경 사이의 문제점들은 ‘환경위기’라 부르는 모든 영역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보여요. 지구 온난화, 오존층 파괴, 열대우림을 인간의 기계가 파괴하는 것, 당장의 제주 앞바다에서 하얗게 죽어가는 산호초, 어류 남획, 멸종, 유전적 다양성 손실-몬산토의 횡포-, 다소 빈곤층들이 먹을 수 밖에 없는 유독한 환경과 음식의 증가, 사막화, 물 공급의 감소, 깨끗한 물 부족, 방사능 오염 등이 여기에 포함되며 이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적다보면 빼곡이 적어도 다 적지 못할 정도로 그 범위는 촘촘히 연결되고, 점점 늘어나 알아보기에도 벅차기도 해요. 이 중 지구 온난화 경향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일찍이 재앙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지만, 화석 연료의 방출 때문에 생겨나는 이 문제의 처리를 위해 해 높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해요. 지구에 가격을 매기거나 오염도에 가격을 매기는 방법도 있지만 결국 그것은 기업들의 “난 했다!, 난 냈다!”라는 거추장스러운 명목만을 세우는 것이거나 자연 자체에 대한 일정수준의 오염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오염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에요.

알아야 하는 것을 두고, 저는 기후변화에 힘쓸 수 있는 정치인과 자본가들이 왜 이러한 ‘불편한 진실’6*을 내 곁에 둔 채, 화장실이 없는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왜 나의 삶을 주관하는 모든 소비활동도 상단부분 ‘파괴’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 굴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통탄스러워요. 왜 죽어서의 천국을 찾고, 현실에서 지름 있는 곳에서 내 곁의 당신, 타인, 우리와 함께 방지하고 제도적 협약을 만들어 막을 수 있는 천국 찾지 않는 것인지 마음이 답답해져요. 기후위기를 적극적으로 변화하려는 움직임이 전지구적으로 보이지 않는 한 더 이상 웃는 것은 웃는 것이 아니에요. 기쁨은 기쁨이 아니에요. 여행을 가거나 집터를 구할 때에는 핵폭발이 있을지, 가까운지 끊임없이 안위를 걱정하게 되고, 음식을 먹으면서는 오염도나 공장체계로 인한 학대를 측정하게 되요. 아마도 전 후대에게 얼굴을 들어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울 거에요.


결국, 전 조지 오웰의 “두꺼비에 대한 단상2**”에서 글은 계급적 관점을 추가하여 이렇게 말했으면 해요. “당신이 실제로 병들고, 굶주리며, 공포에 떨고, 감옥이나 행락지에 갇혀있기 때문에 봄은 봄이 아니다. 원자폭탄이 공장에 쌓여가고 경찰을 시내를 어슬렁거리고 확성기를 통해 거짓말이 흘러나오지만 인간은 자연의 태양을 보며 생태계의 순리대로 살아가지 않고, 자본주의의 시계에 맞추어진 전등 불빛에 생활 패턴을 맞추고 독재자나 관료 혹은 기업-맥도널드 등의 회사-에 일하는 사육사가 독점된 이윤에 따라 전등을 관리하기에 소생하는 봄은 이체제-자본주의-의 족쇄하에서 모두 신음하고 있거나 어느 정도 신음할 수밖에 없다” 자연과 자본주의의 사회적 위기는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죠.



3. 훗날을 약속하고 싶다면


이것 하나는 확실해요, 훗날에 대비하고자 한다면 맞닥뜨린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암울해지기보단 함께 연대하여 이 기후위기에서 살아갈 힘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훗날은 오지 않아요. 그러니 부탁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가 될 때까지 이곳을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지 마세요. 나와 손잡은 다음 세대여, 우리 함께 훗날을 꿈꾸어요. 우리만이 뛸 수 있어요. 그러니 함께 뛰고 저항해요. 그리하여 “반짝이를 좋아하면서도 이중잣대를 반대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분홍색 옷을 입으면서도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7* 어떠한 사정으로 육식을 하면서도 동물권의 가축화 문제를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에요. 핵발전소를 시위에 서 있는 저희에게 “니들은 전기 안 쓰고 사나? 다들 전기 쓰고 사는데 와 이런 횡포고? 비키라!”8*라고 말하며 이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환원시키지 말아 주세요. 자본가의 지배이데올로기에 힘을 불어주고, 웃음을 돋아나게 하는 것은 그만하고, 원자력 발전소로 위장한 핵발전소의 책임지지 못할 행동들을 그만하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선택하지도 않은 채- 장악하고 있으며 결국 사회과학적으로 파멸을 불러올 것이 명확한 지배적인 구조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인간에 의한 지켜야 할 생태 이론이 아닌 인간의 존엄, 생태적인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희망으로 힘을 합치어 결국에 모두를 위한 만세를 외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각주

1*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운동): 1950~1960년대에 걸쳐 미국의 흑인이 시민권 신청과 인종차별의 해소를 요구한 대중 운동. 일반적으로 1954년, 1955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과 로사 파크스에 의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에 따라 결실을 보았다. <위키백과>

2* 기업은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 우리 집 뒤뜰에는 안된다) 담론으로 여론을 유리하게 조성, 환경 정의 운동은 나이비(NIABY: Not In Anybody’s Back Yard 누구의 집 뒤뜰에도 안 된다) 논리로 반박.

3* 국제적으로 160개 이상 단체 참여 조직, 가난한 나라 농민과 원주민, 여성의 입장에서 생태 부채문제를 기후 정의 측면 강조.

4* 계층 관점/계급 관점의 일면적 한계 벗어나 자본 관계의 총체성 관점 제시.계층 관점이 환경 문제를 초역사적으로 보는 방식에서 벗어나 역사적으로 환경 문제의 보편성/특수성으로 구분하여 접근,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환경오염이 악화와 환경 불평등의 현상을 분리해서 해석 → 이것은 계급 관점에서 환경 불평등을 생산영역으로 환원하는 방식을 비판한 것.

5* 브룬란드 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1987)’ (인류가 지향해야 할 기본전략 담은 보고서 WCED(1987) ‘우리 공동의 미래’ “미래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에 손상을 주지 앓으면서 현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을 의미” → 다소 추상적 정의

6* 레이첼 카슨 언급.

7* 리나 월슨, <미스 아메리카나-테일러 스위프트>, 다큐멘터리, 1시간 25분, 2020.

8* 박정우, <판도라>, 드라마/스릴러, 한국, 12세 관람가, 136분, 2016.






미주

1** 석영중, 『인간 만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읽기』, 세창 출판사, 2018, p.27~29. (인간의 ‘물질화’란 개념은 인간을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던 도스도옙스키의 글에서 기초했다. 그를 설명하는 석영중 교수는 이렇게 글에서 적고 있다.)“결국 도스토옙스키가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해 가장 단호하게 반대했던 것은 모든 인간적 가치의 ‘물질화’였다. 인간을 설명 가능한 완제품으로 볼 때 인간의 물질화를 피할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가 그토록 강력하게 인간은 완성되지 않은 존재라 강변했던 것은 인간의 물질화야말로 온갖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노예제에서 우생학에 이르는 온갖 반(反)휴머니즘의 토대에 인간의 물질화가 도사리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로써 도스토옙스키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삶을 ‘영원한 추구’로 보았다고 한다. 후에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 인간론의 이러한 특징에 주목하여 비최종정, 미정성, 미완결성이라는 관념을 개진한다.)

2** 존 벨라미 포스터, 추선영 옮김,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책갈피, 2007, p.125~126. “1945년 조지 오웰은 ‘두꺼비에 대한 단상’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는 수조 안의 올챙이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해서 자연 일반이 그러하듯 그 봄날은 영원히 소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사회가 아무리 억압적이어도 자연은 변함없이 영원한 안식처이며 ‘잉여 에너지’의 원천이다.” (위의 글에선 문장을 바꾸었지만 원래 조지 오웰의 글은 이와 같다.) “당신이 실제로 병들지 않고 굶주리지 않으며, 공포에 떨지 않고 감옥이나 행락지에 갇히지 않는 한 봄은 여전히 봄이다. 원자폭탄이 공장에 쌓이고 경찰은 시내를 어슬렁거리고 확성기를 통해 거짓말이 흘러나오지만 지구는 여전히 태양 주위를 돌고 있으며 어떤 독재자나 관료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한들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자본주의 체제의 족쇄하에서 우리 모두 신음하고 있거나 어느 정도 신음할 수밖에 없다. (...) 만일 인간이 돌아오는 봄을 누릴 수 없다면 거의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유토피아에서 살아간다고 한들 행복할 수 있을까?”






참고문헌

- 책

베리 카머너, 고동욱 옮김, 『원은 닫혀야 한다-자연과 인간과 기술』, 이음, 2014.

존 벨라미 포스터, 추선영 옮김,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책갈피, 2007.

석영중, 『인간 만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읽기』, 세창 출판사, 2018


- 논문

「자본주의적 환경 불평등과 환경정의」, 김민정

「지속가능발전의 개념과 논의 전개」, 2007, 정연근, 장민수


- 영화

박정우, <판도라>, 드라마/스릴러, 한국, 12세 관람가, 136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