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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소포타미아 Jul 23. 2023

첫 출근 날, 과장에서 대리가 되었습니다

내 인생 최악의 첫 출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런 말을 누가 처음 했는지 모르겠지만,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나는 20대 전반을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했지만 여러 가지 직업 전문성의 이유로,

더 큰 빅피쳐를 위해 한국 이직을 결심했다.


마침, 또 한 번의 기적 같은 타이밍으로 한국 헤드헌팅을 통해 한 회사를 알게 되었고

나름 나쁘지 않은 조건에 직급도 한 단계 올려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하여 오퍼레터를 받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한 편으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6년 만에 첫 한국 직장 첫 출근을 준비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살면서 가장 크게 회사에게 뒷 통수 맞아본 경험담이다.









1. 사건의 발단



사실 나는 인사팀에서 결정한 회사 최연소 과장이었다.

해외 글로벌 기업 근무 경력, 석사 취득, 외국어 능력 등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비록 전체 근무경력은 실제 과장 필요 경력에 조금 모자라지만 정당한 이유로 가산점을 받아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인사팀에서 소위 핵심인재라고 분류하여 과장 직책에 대해 본부장님까지 결재가 승인되어 입사가 확정되었다.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결론된 일을 그 누가 의심 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작은 회사도 아니고 나름 이름난 규모의 회사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대망의 입사 당일,


나는 당연히 나의 직책을 과장이라고 소개하였고, 회사 사람들은 나의 나이에 비해 직책을 높게 받은 나를 신기해했다.



문제는, 우리 그룹장이었다.


첫 출근 날, 나의 그룹장이 될 사람은 당시 해외 출장 중이었다.

나에게 첫 출근 날 반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카톡을 남기고 나서, 몇 시간 뒤 카톡 하나가 더 왔다.


"OO 님, 혹시 직급이 뭐예요?"


"네 그룹장님, 과장입니다." 

나는 싸한 기운을 직감하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 같은데요, OO 씨 경력이 총 N이어서 대리가 맞습니다. 인사팀에서 전달받은 게 맞나요?"


"네 그룹장님, 인사팀에서 전달받은 것 맞습니다. 제가 N차 경력이지만 취득 학위(석사)를 추가 경력으로 인정받아 과장으로 입사 안내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룹장은 한 동안 답장도 없고 내 카톡도 읽지 않았다.


잠시 뒤, 인사팀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OO 씨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인사팀은 나를 앞에 앉혀다가 두 시간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어떠한 인사팀 기준으로 과장으로 결정되었는지,

왜 내가 합류하게 된 현업 부서의 그룹장이 나에게 직책 착오가 있는 거라고 하는지.


결론은, 인사팀에서 나의 직책을 최종 결론 낸 부분에 대해서 현업 부서 그룹장에게 공유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왜 내부적으로 현업 부서와 공유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인사팀의 변론은 그렇다.

나를 채용 당시, 현업 부서에서 나에 대한 희망 채용 직급(대리)에 대해서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인사팀 자체 기준으로 결론을 냈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할 말을 잃었다.


그게 말이나 되냐고.

이미 오퍼레터까지 다 사인해서 첫 출근까지 한 마당에 이제 와서 그걸 알려주는 회사가 어디 있냐고.


그리고 인사팀은 나에게 더 한 요구를 했다.




"대리로 직책을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2. 나의 행동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는 딱 잘라 얘기했다.


"만약 직책 변경을 받아들이더라도, 이건 이에 따른 보상 조치가 필요합니다."


"어떤 보상을 원하시는데요?"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고!!!!

일 잘 못한 너네가 알아서 찾아보고 나에게 제시를 해야지 피해자에게 뭘 원하는지 물어보는 게 이게 말이나 되냐고.


라고 생각을 했지만 노답 노띵킹인 인사팀의 얼굴을 보고 나는 며칠 고심 끝에 현실적인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만약 올해 대리로 입사하더라도, 내년에 조기 진급자로 올려주시던가 아니면 추가 연봉 조정을 원합니다."


이거야 말로, 피해자를 마치 뻔뻔한 인간 또는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어버리는 상황이었다.


"저 근데 OO님, 사실은 저희가 OO님을 과장으로 현업부서에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OO님의 그룹장님이 회사 로열패밀리예요."



이건 또 무슨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연재할 법한 설정이란 말인가.

인사팀 말은, 우리 그룹장이 회사 실세라 눈치가 보여 도저히 그룹장에게 반론을 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보고 그룹장이랑 직접 얘기해서 직급 문제를 쫑내라는 거였다.




입사 첫날,

그리고 퇴근 첫날,

나는 집에 돌아와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울었다.






3.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나는 그룹장이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룹장이 회사로 복귀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나는 절대 내 직책이 '대리'라고 못 박힌 근로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을 거라고 인사팀에 통보했다.


그렇게 그룹장과 face to face 면담을 하기까지 2주 동안 불안과 스트레스 속에서 출퇴근을 했다.

마치 인사팀은 내가 대리 직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대안은 없고 퇴사밖에 선택지가 없다는 듯이 얘기했기에.


그룹장은 내가 왜 과장으로 입사하면 안 되는지 '진짜'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고

그저 나의 경력 연차만 가지고 본인 주장을 밀어붙였다. 

친절해 보였던 그룹장의 모습은 한순간 온데간데없이, 나의 권리를 말하는 나를 오히려 버릇없는 사람, 기 센 사람, 당돌한 사람으로 보았다.

내가 잘 못 한 일도 아닌데, 이 일로 나는 첫 시작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로 씌워져 나의 관리자에게 미운털 박힌 사람이 되어버리는 게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인사팀이 알려준 그룹장의 '진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 나와 같은 팀의 대리가 있는데 그 사람은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지만 아직 대리였고, 올해 인사평가에서 과장 진급에 떨어졌다. (나보다 나이 많은 것은 당연)


2. 내가 입사하기 전, 이 팀에서 최근 진급 관련 이슈로 퇴사자가 몇 있었다.


3. 그룹장 본인도 (로열패밀리시라) 낙하산으로 그룹장 자리에 앉아 있어서 나이가 나와 크게 차이가 안 난다.



결론은, 그룹장은 내가 최연소 과장으로 입사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줄 뿐만 아니라,

팀 내부적으로 교통정리가 안될 것을 우려하여 나에게 직급변경을 강요한 것.



무려 한 달 동안 나는 근로계약서 서명을 거부하고 매일 같이 출근은 하면서 이걸 노동청에 신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가 서명한 오퍼레터의 법적 효력의 여부에 대해 조사하고(근로계약서에 준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지인들의 자문을 구해가면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내가 다른 식으로 발악해서 이 직급을 지키고자 회사와 싸우는 건 결국 나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것 같아 망설여졌다.


"저는 OO 씨가 대리가 아니었으면 뽑지 않았을 거예요. 더 보상해 줄 것도 없고, 조기 진급자 선정도 없을 겁니다. 본인이 고민해서 판단하세요."


이게 내 그룹장한테 들은 마지막 말이다.



그래서 나도 마지막으로 말했다.


"저는 그룹장님이 그리시는 조직의 모습이나 방향에 대해서 일체 반발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저 저는 입사 전에 제 직급, 소속, 연봉의 조건이 기재되어 있는 오퍼레터에 서명을 하고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이 일이 벌어진 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리고 회사 내부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지금에라도 시정하려는 의도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지금 이러한 모든 과정이 저에게 너무나 강압적이고 일방적으로 느껴져서 많이 부담됩니다. 이미 제게 직급 외에 조건에 대해서 충분히 지급되었다고 생각되셔서 추가 보상이 없다면 그것 또한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서 제가 지불해야 했던 절차적, 비용적 과정들을 모두 고려하지 않고 이렇게 요구하시는 게 제게도 많이 쉽지 않다는 걸 그룹장님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직급은 제 실력으로 증명해서 올라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곳에서 데여도 봤고, 넘어지고 주저앉다가를 반복했던 나의 다사다난했던 지난 경험들을 통해 

그제야 누구와 싸우지 않고 내 품위는 지킬 수 있는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다.






+a 마치며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6년 만에 처음 돌아온 한국 회사, 결국 한국 회사 문화는 다 이렇구나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들 적당히 접어 두기로 했다.


결국 부정적인 생각은 내 인생을 잠식할 뿐이다.



참고로, 내가 이 회사를 들어오기 위해 지불했던 절차적, 비용적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영국에 있는 글로벌 대기업의 잡오퍼를 거절했다. 

2. 역시, 영국에 있는 한국 대기업의 나름 전망 있는 잡오퍼를 거절했다.

3. 이 한국 회사를 들어오기 위해 본가에서 멀리 떨어진 회사 근처로 집을 구했다.



이 쯤되면 여러분은 나를 왜 그런 오퍼들을 다 버리고 연봉도 훨씬 낮은 이 한국 회사를 선택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 얘기 안 한다. 나의 직업 고르는 기준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설명할 예정.



주변인들에게 누차 얘기하지만 내가 겪은 이 일은 절대 작은 일이 아니다. 

연봉과 직급은 우리 생계의 거의 전부이며, 앞으로의 방향과 커리어 의사결정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회사는, 그룹장은 내가 겨우 사원-대리 급이라고 생각해서 이 사안을 별일 아닌 것처럼 치부해 버렸지만, 그러한 무관심과 오만함은 결국 다른 데서 실수를 낳는 행동이라는 걸 모른다.



많은 회사생활을 통해 깨닫게 된 인생의 진리 중 하나는,

내가 받은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게 될 것이며,

내가 받은 피해는 다른 이가 대신 갚아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시시한 자갈들에 눈길 주지 말고 나를 지금 당장 더 성장시킬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문득, 채용 전 그룹장이 면접 때 나에게 물어본 질문이 생각난다.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나는 뭐라 뭐라 대답을 했고,

그룹장을 포함한 다른 면접관들은 말했다.



"훌륭한 답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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