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감정은 어떻게 구조화되었는가
나는 그에게 제안서를 건넸다.
‘쇼윈도 부부’로 살자고, 조건을 정리한 서류였다. 과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도록 CCTV의 방향까지 제안서가 놓인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나는 외출했다.
이제, 그의 반응을 기다릴 차례였다.
그는 집에 들어와 제안서를 보더니, 펼쳐보지도 않은 채 조용히 방에 넣었다.
이건 내 계획에 없던 장면이었다.
‘혹시 끝까지 읽지 않으면 어쩌지?’
당황한 나는 계속 CCTV 화면을 들여다봤다.
한참 후, 그가 제안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넘기는 태도는 아니었다. 차분히, 한 줄 한 줄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순간,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외출 중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화를 내거나 폭발할까 봐, 일부러 집을 비운 터였다.
하루 종일 아무 일 없던 듯, 평소처럼 일상을 보냈다.
그 제안서에는 3일의 유효 기간을 명시해두었다.
“3일 내에 수락하지 않으면, 이 제안은 폐기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의 표정을 떠올리자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래도 수락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마지막 날, 그에게 보낼 문자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나의 조건을 받아들이게 만들 트랩.
어떤 방식으로, 어떤 단어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마지막 날이 오기 전날 밤, 그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받아들일 내용이 없다.”
거절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허무했다.
나의 계획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그날 밤,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마지막 날 오후 4시에 보내야겠다.’
하루 중 가장 애매한 그 시간대에, 가장 모호한 어조로 트랩을 던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4시가 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화해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건 내가 원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참 바보같이도, 내 마음은 또 희망으로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토록 당하고 나서도, 나는 또다시 기대를 했다.
그의 진심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잠시 흔들렸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나는 장문의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15년의 시간을 정리하듯, 그와의 생활에서 내가 느낀 감정들을 담담히 적어 내려갔다.
자극적인 표현은 배제했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의 진심만 담고 싶었다.
문장을 쓰다 눈물이 났다.
지나온 기억들이 떠올랐다.
마치, 한 장의 영화처럼.
문자 말미에 이렇게 썼다.
“서로가 행복한 선택을 하기를 바랍니다.”
그는 답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선택은 그가 하라고 했다.
그는 끝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다.
그에게 ‘선택’이란, 곧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와의 관계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나에게서 일어났다.
나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반응하고, 아이들 앞에서도 폭발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구조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이건 나의 책임일까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마치 머릿속에 ‘매뉴얼’이 생긴 것처럼,
사건과 감정을 분리해 분석하고 판단하는 내가 있었다.
이전엔 상상도 못했던 변화였다.
나는, 달라졌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은 이 고통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모든 과정이 흥미로웠다.
나는 그때, 조용히 결심했다.
심리상담 공부를 시작하자.
그것이 나의 아픔을 의미 있게 만드는 길이라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