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했지만 아직도 나는 그의 반응에 울고 웃는다.
상담을 통해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교회는 내 삶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가정을 여럿 만났다.
모두가 나르시시스트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아내들이었다.
같은 나르시시스트라도 성향은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했고, 무던하게 노력하며 함께 버텼다.
격려하고 공감하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견뎌냈다.
운명의 장난처럼, 마치 약속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비슷한 시기에 위기를 겪게 되었다.
세 가정 중 두 가정은 남편의 외도로 결국 이혼위기를 맞았다.
남은 한 가정은 아내가 힘에 부쳐 먼저 거리를 두었지만,
그 남편 또한 외도를 시작하며 또 다른 파국을 맞았다.
나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단 하나의 사소한 그의 말에 멈춰 섰다.
‘더는 이렇게는 못 살겠다.’
그 순간은 내게 각성이었다.
최근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아내를 만났다.
엄마가 나르시시스트, 시어머니 또한 나르시시스트, 남편 역시 나르시시스트인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그녀의 삶은 나보다 훨씬 더 지치고 고단해 보였다.
처음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시부모에게 헌신하고, 그러기 위해 남편을 밀어낸 그 선택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녀는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며,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시간이 흐르며 그녀는 남편을 다시 붙잡고 싶어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무너졌다.
나는 그녀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녀는 성장 과정부터 책임감으로 다져진 사람이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딸로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감정을 마음껏 휘두르는 사람들과 함께 살며, 내 감정을 지켜내는 일은 너무도 어렵다.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단단한 사람이었다.
진실을 궁금해했지만, 어디선가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그녀가 이번 일을 계기로 각성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녀를 보며 각성했다고 믿었던 나 역시, 감정의 널뛰기 속에 있었다.
어느 날은 모든 걸 이겨낼 것 같았고, 다음 날은 온종일 멍하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편히 두지 않았다.
나 스스로를 계속 시험했다.
그는 마치 복수라도 하듯, 할 수 있는 최악의 수를 두며 나를 괴롭혔다.
나는 무뎌지려 애썼지만 자꾸 흔들렸다.
나는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았지만, 그는 결코 내게 항복할 마음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나에게의 항복’은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나는 그가 무너질 거라 생각했던 지점마다 흔들렸고, 그 역시 나를 흔들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몰아야 그가 각성할까. 답답함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조용한 신호 하나를 남겼다.
그가 외박하고 돌아오는 날, 눈에 잘 띄는 곳에 아무 말 없이 카드를 하나 두었다.
그가 알아차릴 수도 있고, 지나칠 수도 있는 아주 작은 장치.
하지만 곧 후회가 밀려왔다.
그의 외박에 반응한 모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알지 못했지만 하필이면 그날은 그의 휴일이었다.
그는 명함을 보고 내게 연락했다.
“나 보라고 일부로 올려뒀냐?”
그 순간, 복잡하고 미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참지 못하고 그가 내게 반응해버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두려움이 몰려왔다.
‘혹시 그가 집 안을 뒤져, 내가 모아둔 증거들을 찾아내면 어떡하지?’
이건 내가 설계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그저 그가 겁을 먹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모든 패를 그에게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도,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하루 종일 얼어 있던 내 몸이 조금은 녹는 듯했지만, 이내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를 놓는다면, 이런 고통은 겪지 않아도 될 텐데.
나는 왜 아직도 그의 반응 하나에 울고 웃는 걸까.
하지만 나는 다짐했다.
나는 그 위에 설 것이다.
나는 이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고, 끝내 나로서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위기를 헤쳐갔다.
한 아내는 이혼을 선택했다.
또 다른 아내는 이혼을 유예하였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세 번째 아내는 이제 막 진실을 알아차렸지만, 이혼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진실을 끝까지 확인하겠다고.
그리고 나는, 그 위에 서겠다고 결심했다.
울면서, 흔들리면서도, 나만의 방식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다.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 버티고 있다는 것.
며칠 전, 진실을 확인하겠다고 말하던 그녀는 한결 가라앉은 얼굴로 내 앞에 다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의 조언을 실행했고, 그것으로 남편의 변화를 느꼈다고 했다.
나는 그녀와 마주 앉으며, 마치 한두 달 전의 나에게 말을 건네듯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힘들게 건너온 길이지만, 그녀만큼은 그 길을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지나가길 바랐다.
그녀는 집중해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진실을 직면하는 게 무서워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장은 괴롭겠지만, 당신 자신을 먼저 단단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진실을 볼 수 있어요."
나는 바랐다.
그녀가 내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길.
그리고 그녀의 남편에 대해, 그의 성장 배경과 가족 구조에 대해 자세히 공부해보길 권했다.
“그의 가족, 너의 가족. 그 두 구조가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금의 현실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흘러갈지를 꼭 생각해봐요.”
그녀가 처한 현실은, 누구보다 잔인하고 버거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랐다.
그녀가 각성하길.
무너져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다시 일어서길.
그녀가 더는 누구의 아내나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길.
그게 지금, 내가 가장 바라고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나 또한, 조용한 도박을 시작했다.
그가 내가 설계한 구조 안에 들어오도록, 실패를 감수한 도박이었다.
그 도박은 내 감정과 시간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모든 순간을 계산했고, 그의 패턴을 예측하며 하나씩 움직였다.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내가 더는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