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父子 3
입으로 먹기전에 눈으로 먼저 먹는게 일본 음식이라는데 홋카이도 동북부에 위치한 도시 쿠시로 기차역에서 급하게 고른 도시락 역시 뚜껑을 열자 15가지 이상의 앙증맞고 가지런히 정돈된 반찬들의 색감이 눈을 즐겁게 만들면서 식욕을 돋웠다.
반찬 하나 하나가 간이 잘 배여 맛이 깔끔하고 맛깔져 특급 호텔 세프의 고급스런 손길이 느껴지는 만족스런 한끼의 식사였다. 지금까지 먹어본 도시락중 단연 최고의 맛과 품격 이었다.
호텔 음식부터 길거리 음식까지, 어떠한 장소에서도 입을 즐겁게 만드는 일본 음식은 일본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첫날 삿포로에 도착해 편의점에서 저녁 식사용으로 고른 즉석 요리를 먹으면서 아들은 어떻게 편의점 음식이 이토록 맛있을 수 있느냐며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한끼를 때우는데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맛도 맛이지만 즉석음식 종류의 다양성에 놀라왔다. 오죽하면 알바로 돈을 벌어 편의점 음식으로만 생활하는 편의점족까지 생겼다고 할까?
일본에는 수대에 걸쳐 장인정신으로 맛을 전수하는 식당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행을 하다가 우연 들린 소도시의 어느 식당이나 선술집에서도 내어놓는 음식 대부분이 맛에는 일가견이 있는 듯 했다. 홋카이도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면서 항상 부러운 마음이 있었는데 음식 마저도 맛깔나니 그 부러움이 더했다. 부러우면 지는것이라는데
어린시절 아버지와 많지 않은 추억 가운데 하나가 명절을 앞두고 집과 멀지 않았던 유성온천으로 묵은때를 벗으러 다니던 일이다.
욕탕문을 열면 밀려드는 열기와 수증기에 압도되어 지옥에 끌려가는 듯한 두려움에 가득차곤 하였다.
어린시절 두려움의 장소 였던 온천이 가끔씩 일본에 올때면 찾게되는 로망의 장소가 되었다.
땅속의 열기와 천연 미네날이 가득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마음도 몸도 건강체로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다.
이번 홋카이도를 여행하면서 온천욕에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는데 동행하는 아들이 사춘기 이후로 아빠와 목욕을 하는것을 낯설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외로 노천 온천욕에 대한 호기심을 보여 기회를 엿보던 중 우연히 가게된 이름 모를 시골역 근처의 허름한 온천에 들어가보니 탈의실과 매표실이 한공간에 있어 수줍은 많은 아들이 입욕권을 팔고 있는 할머니 앞에서 옷을 벗고 탕에 들어가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기차를 잘못타 내린 또 다른 시골역에서 혹 하는 마음으로 관광안내도를 보니 근처에 온천이 있어 가보니 이전 온천탕보다는 시설이 나은편이긴 하였으나 우리의 동네 대중탕 수준 이었는데 마을의 사랑방처럼 마주치는 사람들끼리 인사말을 건네는게 그동안 관광지 온천탕과는 다르게 정겹게 느껴졌다.
온천 성분표 상으로는 주된 미네널이 나트륨과 칼륨인 미끈미끈한 물의 감촉이 시골 마을 온천치고는 제대로된 온천수를 만난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한시간여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다 역으로 돌아와 기차를 타고 늦은밤 목적지인 가와유 온천 마을에 다다르니 마을 전체가 수증기로 뒤덮혀 유황냄새가 진동하는게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른 시간 잠에서 깨자마자 호텔에 딸린 온천탕을 찾았다. 대형욕장을 전세 낸듯 아들과 단둘만이 있는 탕에 몸을 담그니 온천 특유 물의 감촉이 전해왔다. 달걀 썩는듯한 유황향과 비취빛 물빛이 제대로 온천욕을 즐긴다는 마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온천 음용대가 있어 맛을보니 산도가 높은지 식초를 마시는 듯 신맛이 강했다. 며칠만에 시커멓게 녹이슨 전시된 못을 보니 처음 몸을 담갔을때 피부와 눈이 자극적인 이유를 알 듯 했다.
떠나기 마지막 전날까지 아들의 로망인 노천 온천욕을 경험하게 못해줘 아쉬웠는데
에머랄드 빛 폭포로 유명한 시로가와 수염폭포를 찾아가니 그곳에 온천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온천욕을 즐기고 싶었지만 폭설이 예보되어 있어 혹 온천욕을 즐기는 사이 눈이라도 퍼부어 길이라도 막히게 되면 낭패라는 생각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뒷일은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였다.
폭포위 전망이 좋은곳에 위치한 전망이 호텔에 들어가 투숙객이 아닌 일반인도 노천탕을 이용한 수 있느냐고 물으니 가능하다고 하여 아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다.
눈이 쌓인 소나무 숲 중앙에 노천탕이 자리하고 건너편으론 푸른 조명빛에 어둠속 설국의 숲이 펼쳐지고 하늘에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폭포수의 거친 물소리를 들으며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탕밖으로 나오니 한기가 몸을 감싸지만 탕속으로 뛰어드니 몸은 남국이요 머리는 청명하니 이곳이 바로 천국인데 아들과 온천의 추억을 공유할수 있어 더 의미가 있을 듯 하였다.
다음날 귀국을 위해 삿포로로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모니터를 통해 일 미터 이상의 폭설예보 속보를 긴박하게 알리고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경험하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가 영화 철도원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눈발이 휘몰아치는 설원을 헤쳐 나가는 기차를 타보는것 이었기에 귀국일을 늦춰서라도 그 폭설을 경험을 하고픈 유혹이 일었다.
삿포로 역에 도착하니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도심의 조명의 불빛과 어울려 멋지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니 아들과의 홋카이도 여정의 피날레를 축복해 주는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