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청춘 ! 응답하라 2000
가끔씩 지인들로부터 오랫동안 많은 곳을 여행하였으니 이제는 여행하는 것이 쉽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십여년 넘게 비즈니스 또는 개인적으로 70개국 이상을 여행하였으니 경험만으로는 베테랑이라고 할만도 한데 그렇다고 여행이 항상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여행 초창기만 하여도 여행은 별다른 걱정 없이 그저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행을 하면 할수록 예상치 못한 크고 작은 일들을 만나면서 세상에 만만한 일은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야구 속담에 ‘끝날 때 까지 끝난게 아니다’ 라는 말이 있듯이 여행을 떠나 우리나라 공항 입국장에 도착하기 전 까지는 항상 긴장의 끈이 놓여지지 않는것을 보면 여행도 야구와 닮은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여곡절을 경험한 여행들이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직장시절 중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가나, 아이보리 코스트를 거쳐 북부 아프리카의 모로코, 튀니지에서 중동의 오만, UAE, 카타르등 경유지 포함 이십여일동안 10개국을 방문하는 비즈니스가 목적인 여행이었다. 비행기 요금만도 이천만원이 넘었으니 개인이 떠나기는 쉽지 않은 여정 이었다.
첫 목적지인 아프리카 가나(Ghana)로 들어가는 직항이 없어 영국을 경유해야만 했다. 그런데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해 근처 호텔에 숙소를 잡은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가나행 비행기가 히스로 (Heathrow) 공항이 아닌 런던의 또 다른 공항 캐트윅(Gatwick)이었기에 아침에 서둘러 버스를 탔는데 서서히 도로가 막히기 시작하더니 차량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다가오고 초조함을 넘어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평상시에 히스로 공항에서 개트윅 공항까지 한시간이면 충분하였기에 출발 3시간 전에 떠났는데도 캐트윅 공항에 비행기 출발시간 30분전에야 겨우 도착하였다.
정신없이 체크인 카운터로 달려가니 조금전에 클로징(Closing) 되어 탑승권 발권이 불가하다 하였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놓치는 경험을 국내선도 아닌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국제선에서 경험 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다음 비행기는 일주일 뒤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십여일의 일정이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공황 상태가 되었다.
마음을 안정시킨 후 방법을 찾았다. 히스로 공항에서 당일 저녁 늦게 다른 항공편이 있다는 소식에 희망을 품고 다시 히스로 공항으로 향했다. 가나 에어라인 체크인 카운터에 도착하니 예약은 만석인지라 출발시간이 10시간도 넘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대기자 (waiting) 줄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은 몰려들고 이미 예약한 사람들의 줄조차도 끝이 보이지 않자 불안감은 커져갔다. 티켓은 겨우 변경 했지만 취소된 예약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나와 같은 대기자들은 탑승의 기회조차 사라질 수도 있어 발권 예정 시간인 오후 8시까지 열시간여 기다림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하늘이 도와 가까스로 탑승권을 얻으니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 천국행 티켓을 얻은 기분이었다. 객실 좌석이 아프리카 흑인 여행객들로 채워져 사방이 깜깜한게 이채로왔다. 긴장이 풀리니 피로가 엄습하고 얼마전 맞은 풍토병인 황열병 예방 주사 때문인지 학질에 걸린 듯 한기가 찾아와 담요를 뒤집어 쓴채 끙끙 앓으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깜빡 잠이든 듯 하였는데 덜컹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큰 함성과 흑인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에 뭔 일인가 했더니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했다는 의식이었다.
아프리카의 중심부 가나(Ghana)의 수도 아크라(Accra)에 도착하니 새벽 4시였다. 국제공항임에도 우리나라의 시골 버스 터미널 보다도 못한 낙후함이 느껴졌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호텔로 가려고 공항을 나와 택시 정류장으로 가다보니 바깥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컴컴해길가에 늘어선 환영객들의 흰 눈동자들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 문득 밤에 택시를 잘못타면 택시기사가 정글로 데려가 강도로 돌변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다시 공항 대합실로 돌아가 여명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날이 밝자 택시를 타고 척박한 아프리카 땅을 달리다 보니 한국에서 떠난지 40여시간 만에 아프리카 땅에 당도 했다는 남다른 감회가 밀려왔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 하고 샤워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곳 바이어와 약속 시간이 채 얼마 남지 않아 로비에서 두시간을 버티면 호텔비도 아낄 수 있을 것 같아 그대로 버티었다. 나를 만난 바이어는 전날 입국장에서 모습이 안보여 무척 걱정했는데 만나게 돼서 다행이라고 하였다.
한나라의 수도 임에도 거리는 낙후하여 대부분 도로는 비포장 이고 번듯한 건물 한채 찾아 보기가 힘들었다. 시장에서 잡다한 물건을 사고 팔며 흥정하는 흑인들의 무리가 보이자 비로소 아프리카의 한 가운데 내가 있음을 실감하였다.
오랜 시간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인 독립은 이루지 못한 듯 아프리카 땅에서 비즈니스 파트너로 흑인들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가나의 바이어 역시 흑인이 아닌 레바논 사람으로 오랜 내전으로 가나에 피난차 왔다가 자동차 딜러로 자리를 잡았다 하였다.
다음 목적지인 아이보리코스트 (Ivorycoast) 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도착 당일 밤으로 예약되어 협상을 빨리 끝내야 했는데 마무리가 늦어져 초조함을 드러내자 상대는 비행기 타는데 문제가 없다며 느긋한 태도를 보이다가 공항에 비행기 출발 30분전에야 데려다 주었다.
탑승권을 발급받아 급하게 출발 게이트로 갔는데 활주로에는 어떤 비행기도 보이지 않았다. 런던에서의 악몽이 떠올라 타고갈 비행기가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아직 도착 조차 안했다며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 하였다. 잠시 졸다 눈을 떠보니 활주로에 비행기 한 대가 보였다. 예정시간보다 5시간이 늦어진 새벽에 비로소 탑승하니 그제서야 가나의 바이어들이 그토록 느긋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나와 이웃 국가인 아이보리코스트까지는 비행기로 한시간 남짓의 짧은 여정이었다. 공항에서 입국중 수화물 검사중에 가방에서 기념품들이 보이자 세관원들이 확인할 것이 있다며 여권을 빼앗아 조사실에 홀로 남겨둔 채 사라져 공포와 불안속에 한시간여를 보내야만 했다.
기념품을 다 넘겨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입국장을 빠져나와 공항에서 밤새워 나를 기다린 바이어를 만나니 너무도 반가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새벽녘 아이보리코스트(Ivorycoast)의 수도 아비잔(Abidjan)으로 진입하는 도로의 거리 풍경은 가나에서의 첫 인상과는 달랐다. 잘 정비된 도로와 길을 따라 늘어선 높은 빌딩에는 글로벌 기업들의 네온 간판들이 번쩍이고 푸른빛 삼성 네온사인 입간판도 보였다.
도심에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고층 빌딩들이 빼곡한 이곳이 과연 아프리카가 맞는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거리를 오가는 흑인들의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면 프랑스의 어느 한 도시라 하여도 믿을 것 같았다.
미팅을 마치고 바이어가 점심 식사를 위해 일식당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 주인이 한국인 이었다. 무슨 사연으로 머나먼 아프라카 땅에서 식당일을 하며 뿌리를 내렸는지는 몰라도 뜻밖에 고국 동포를 보고 반가와 하는 그분의 환한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식사후 도심을 벗어나 산책 삼아 바닷가로 갔다.
아이보리코스트란 아름다운 이름이 식민지 시절 코끼리 상아와 노예 수탈에서 유래되었다는 선입감 때문인지 검푸른 바다의 파도소리가 이곳 원주민들이 노예로 팔려가며 애통해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우리에게도 일제 36년 수탈의 역사가 있기에 그들의 아픈 역사가 남의 일로 보이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치욕스럽고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 했다.
아프리카를 떠올리면 검은 대륙이 연상되지만 모로코(Moroco)는 우리가 상상하는 아프리카와는 달라 보였다.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 아랍계라 그런지 몰라도 사람들의 모습과 옷차림, 건물들 그리고 기후와 지형마저도 중동지역의 모습을 빼닮았다. 공항에서 카사블랑카 도심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구릉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 지평선을 경계로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일출은 황홀 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배경인 모로코의 최대 도시 카사블랑카(Casablanca)는 유난히 하얀집들이 많아 도시이름과 잘 어울렸다.
바이어와 미팅을 마치고 후세인이라는 젊은 친구가 가이드를 자청하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라는 하산2세 사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놀랐다. 모스크 내부 외부에 정교하게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는 신을 향한 경외함이 느껴졌다. 지중해의 푸른빛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바닷가에 장대하게 세워진 이 모스크를 왜 모로코인들의 자랑스러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녁 식사를 위해 영화 카사블랑카의 배경이 되었다는 카페로 갔다. 그 곳에서 해산물 요리와 와인 한잔을 곁들이니 영화 주인공인 험프리보카트가 부럽지 않았다.
한편의 영화가 카사블랑카를 세계인 모두가 기억하게 만들고 낭만의 도시로 인식시키는 것을 보면 영화산업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다시금 느꼈다.
카사블랑카의 밤 문화를 보여주겠다기에 벨리댄서 공연을 기대하였는데 바닷가에 위치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건물로 들어가니 율법이 엄격한 이슬람권 국가에 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서양의 나이트클럽처럼 팝송과 락 음악이 울려 퍼지고 스테이지에는 반라의 여성들이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사이사이 흐느끼는 듯 빠른 템포의 아랍풍 음악이 흐르자 클럽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슬람 국가지만 오랜시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서인지 이슬람의 엄격한 율법과 프랑스의 자유로움이 혼재된 모로코의 특이한 분위기가 이색적 이었다.
모로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튀니지 (Tunisia)의 수도인 튀니스에 도착해 두시간이 넘게 차로 이동하여 호텔에 도착했다.
피곤에 지쳐 그대로 쓰러져 자다가 새벽이 눈이 떠져 창문을 열어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호텔에 들어올 때 까지만 하여도 숙소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감동이 컸다.
해변에는 썬 배드와 파라솔 빼곡하고 해안가를 따라 리조트 시설들이 끝없이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아프리카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바닷물은 계곡물 처럼 맑고 모래는 진흙처럼 부드러워 천혜의 리조트 조건을 갖춘 듯 보였다. 우연히 튀니지 최고의 관광지인 수스(Sousse)에 왔다고 생각하니 이런것도 여행의 묘미란 생각이 들었다.
12월의 날씨인데도 우리나라의 봄날처럼 따사롭고 바람마저 살랑대니 비즈니스가 아닌 휴양하러 이곳에 온것처럼 느껴졌다. 휴가 비시즌이라 리조트는 비교적 한가로운데 유럽의 노년 부부들이 많이 보이는게 유럽 겨울 추위를 피해 이곳에서 노후를 즐기는 듯 하였다.
온화한 날씨에 지중해를 끼고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비치들이 즐비하고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성곽들이 당시 모습으로 남아있고 그리스 산토리니풍의 아름다운 집들이 바닷가 언덕에 펼쳐져 있고 물가마저 저렴하니 유럽인들이 휴가 시즌 튀니지를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천혜의 관광자원에도 불구하고 튀니지인들의 삶이 고단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