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이라 밤새 놀다가 숙소에 들어왔다. 3인실이지만 두명이서 쓰는 줄 알고 짐을 왕창 풀어뒀었는데, 새로운 룸메이트가 체크인해 있었다. 펼쳐진 캐리어와 이리저리 널려 있는 물건들을 보면서 미안함이 앞섰다. 밤새 체력을 다 써버려서 정리할 힘은 없고 씻고 일단 자기 위해 세면도구를 가지러 갔더니, 새로운 룸메이트가 우리를 위해 써 둔 편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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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는 오늘 체크인한 애슐리고, 만나서 반가워! (너희 둘은 아마 한국에서 온 것 같은데!) 나는 홍콩에서 왔어. 1월 3일까지 방을 같이 쓸 거고, 얼른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 오늘 밤에는 볼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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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이런 날 밤을 새고 들어와 버리다니. 이런 편지를 써 둘 정도면 굉장히 사려깊은 룸메이트가 당첨됐겠구나 생각하면서 졸린 눈을 부여잡고 포스트잇에 답장을 휘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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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진짜 진짜 반가워 그리고 나 진짜 진짜 홍콩 좋아하거든 (세 번이나 갔다왔어 특히 라마섬이랑 디스커버리 베이, 완차이 진짜 좋아해!) 카운트다운 하고 오느라 아마 늦잠 잘 것 같은데 그러면 또 인사 못할까봐 미리 미안, 편지로라도 같은 방 쓰게 되어서 정말 좋다고 말할게! 아무튼, 이곳에서 좋은 경험을 만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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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향이 가시지 않은 편지였다. 갑자기 홍콩 좋아한다는 말은 왜 한 건지. 역시나 눈을 떠 보니 룸메이트는 없었고, 해장을 위해 한식당에서 김치전골과 육개장을 먹고 오니 룸메이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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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이면 버밍엄에서 교환학생을 시작한다는 애슐리와 (홍콩 이름은 탐 엿녹, 이고,) 나는 한 시간 남짓한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했고 여행할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드라마란 어차피 바보같은 것이다', 홍콩의 유명 가수를 추천받았고(미약한 와이파이로 2015년 마마에서 그가 공연하는 무대도 함께 봤다.), 휴학을 고민하는 이유, 그녀의 학교와 내 학교가 교환 협정이 되어 있는 학교라 알고 보니 이미 내가 그녀의 대학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그리고 심지어 내가 가려고 했던 교환 학교 후보에 있었다는 것), 외국인들이 한국의 '개조심'이나 '솜틀집'따위의 간판에 매료되는 것처럼 나는 외국인이라 홍콩의 MTR 로고가 너무나 예쁘다는 것(그리고 그녀는 역시나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반의 홍콩 영화와 발전하는 한국의 영화, 장국영과 왕가위, 이런 얘기를 나눌 친구가 많지 않지만 또 많기도 하다는 것, 광동어와 한국어의 발음은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문화 이슈, 관광 정책, 언어 분야와 같은 것들, 훈데르트바서하우스(훈데르트바서를 한자로 百水라고 쓰는 걸 보고 함께 웃었다), 그녀의 부산에 대한 향수와 나의 홍콩에 대한 향수, 최고로 추운 한국의 겨울과 최고로 폭신한 한국의 수면잠옷 등과 같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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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재미있었지만, 나에게 특히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녀가 했던 어떤 말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하며 애슐리는 교환 학기가 끝나면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할 생각이라고 했다. 나도 교환 학기가 끝나고 인턴 하고 싶었는데, 영어가 안 되서 못 했다고 아쉬워했더니 그녀는,
"무슨 소리야, 지금 너랑 나랑 한 시간은 영어로 떠들었는데 이 정도 커뮤니케이션이면 충분할걸."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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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했던 것들 중에서 완벽해진 상태에서 시작했던 것은 없었다. 잘 모르겠지만, 시작하면 어떻게든 하게 됐었다. 한국에 가면 방치했던 링크드인 프로필부터 업데이트하려고 한다.
이 맛에 호스텔 다니지.
<2019.01.02, @Vienna, Aust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