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8년, 그리고 결혼
그렇다,
2015년,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이렇게 오래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 재밌게 데이트나 하자, 했던 것이 8년이 되었고 우리는 지난 5월 결혼을 했다.
'이렇게 오래 만날 생각 없었는데~ 호호호'
같은 재수 없는(?) 뉘앙스가 아니다. 그 당시 나는 정말로 가벼운 연애를 원했다.
구 남자 친구, 즉 현 남편을 만나기 바로 전 연애로부터 나는 심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그 연애를 끝내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1년의 공백이 있었는데, 지난 연애 기간보다 그 1년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힘들었던 연애를 끝냈으니 싱글로 돌아온 게 얼마나 자유로웠겠는가. 무엇보다 연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혹시 새로 남자 친구를 사귄다고 한다면 무조건 이렇게 연애하고자 속으로 다짐했었다.
[힘든 연애를 끝낸 사람(=나)의 당시 새 연애 5계명]
하루하루 데이트에만 충실한다
서로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는다(부모님을 만나 뵙거나 하는)
섣불리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헤어지면 부질없다!)
집착은 견딜 수 없으니 나도 집착하지 않는다.
많은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스트레스받으며 붙잡지 않고 그냥 쿨하게 끝낸다.
지난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나를 위한 연애 5계명이었다. 실제로 이것은 당시 내가 포스트잇에 적어 지갑에 넣어 다녔었는데 이 글을 쓰려고 다시 창고를 뒤져보니 낡은 지갑 속 이 8년 전 포스트잇이 그대로 있더라.
(다시 보니까 너무 웃기면서도 그때 이걸 쓰던 감정이 고스란히 기억나서 감회가 새롭다)
그 이후로 소개를 받지도, 굳이 남자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눈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의 나는 지난 연애에서 내가 참고 감내하고 손해 본 게 너무 많다고 생각했어서 오랜만에 돌아온 싱글의 기간이 너무 소중했고 진짜 나 자신을 되찾는 데에만 몰두했던 것 같다.
이제 다시 현 남편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게 1년을 재밌게 지내다가 자연스러운 계기로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다. 대한민국의 여느 대학생과 다름없었던 나는 내 포트폴리오에 한 줄 추가할 수 있는 대외활동을 찾고 있었고 그때 한 대학교 연합 봉사 동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지역의 초, 중, 고등학생들에게 과학 기술을 가르쳐 주는 봉사활동이었다. 나는 공대생이었기 때문에 분야도 너무 딱 맞아서 주저 없이 지원을 했고 면접을 보고 합격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들어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총 봉사단원이 100명이 넘는 아주 큰 봉사단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지금의 남편이 그 당시 봉사단장을 맡고 있어서 내 면접을 봤었다고 하더라. 그는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애석하게도 그의 외모가 당시 내 눈에 띌 만큼 출중하지는 않았.. 쿨럭)
대 콩깍지의 서막
그렇게 봉사단원으로 활동을 이어오다가, 봉사단 회식자리에서 처음 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100명이 넘는 큰 단체였다 보니 여러 개의 조로 나뉘어 활동을 했는데, 당시 남편과 나는 다른 조에 소속되어 있었다. 나는 우리 조 회식을 갔을 뿐인데 하필 그 술집에서 남편의 조도 회식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나도 봉사활동을 한지 좀 되어서 봉사단장인 현 남편과 안면도 트고 인사도 하고 지냈었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을 다질 기회는 아예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아는 사람을 술집에서 만났으니 너무 반가워서 인사하러 다가갔는데, 봉사단장이자 그 조의 조장이었던 남편은 당시 거의 만취 상태로 그 자리의 분위기를 주름잡고 있었다.
어떻게 주름잡고 있었냐고..?
술을 웬만큼 마셔 흥이 잔뜩 오른 상태로 마주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본인의 티셔츠를 잡고).... 벗어? 내가 이거 벗어? 응?? (아주 해피한 표정)"
마치 예전에 가수 나훈아의 "벗어야 믿겠습니까?"처럼, 본인의 상의를 잡고 벗으려는 시늉을 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장난이고, 나중에 듣고 보니 나름 앞뒤 맥락도 있는 언행이었다. 그렇지만 영락없는 취객의 모습이 아닐 수 없는 충격적인 그의 공식 첫인상..
이 아니라, 그때 나의 콩깍지가 발현되었다. 상의를 탈의하고자 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던 것..!
(이때 이렇게 눈이 해까닥 돌지 않았다면 결혼하지도 못했겠지..?)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죽은 분위기를 살리려는 그의 살신성인 이타심으로 보여 심장이 두근댄 것이다.
지금도 어디 가서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 믿을 수 없는 눈치다. 그러면서 다들 "사랑은 정말 위대하다.."라고 말한다.
그때 그에게 마음이 동한 나는 자연스럽게 접근해 번호를 교환했고, 그다음 날부터 먼저 카톡을 보냈다.
그렇게 계속 연락을 이어가다가 우리는 총 14일 동안 7번의 데이트를 했고, 8번째 만남에서 사귀게 되었다.
그때도 그를 정말 좋아하긴 했지만 언제나 위 <새 연애 5계명>을 마음속에 새기고 가볍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연애를 추구하며 그와 하는 모든 데이트를 충실히 즐겼다. 그렇게 즐긴 하루하루가 모여 어느새 8년이 되고, 20대의 80%를 이 남자와 함께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향후 80년을 약속해 버린 것이다.
인생은 정말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