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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브 Dec 24. 2022

썸인지는 모르겠지만 7번의 데이트

(5) - 만우절에 그를 남자친구로 소개하다

지갑을 잃어버린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우리 집까지 데려다준 그날 밤을 기점으로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관계가 우리 둘 사이에 이어졌다. 썸이라고 하기에는 서로 일절 달달한 말은 주고받지 않았고 (물론 나는 은근~하게 그런 분위기를 만들려는 멘트를 간혹 시전 했지만) 매번 집에 데려다준 것도 아니었으며 당연히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등 곧 사귈 것 같은 남녀의 징조도 없었다. 다만, 그날 이후로 우리 둘은 2주간 총 7번을 만났다.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 내가 이걸 왜 기억하냐면 정말 규칙적으로 이틀에 한 번씩 밀도 있게 만났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을 소개받는 소개팅도 세 번째 만남에서 고백한다고들 하는데 우리 관계는 봉사단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친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모임 포함 10번이 넘는 만남 동안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그렇지만 어딘가 묘한 기류는 분명 있는 것 같았다. 다만, 누가 "너 저 오빠랑 썸 타?" 이러면 자신 있게 "응!!"이라고 답하긴 어려운 정도의 사이랄까?




평범한 데이트, 혹은 말로써 규정할 수 없는 무엇 그 사이 어디쯤엔가 있는 사골 우리듯 짙고도 뭉근한 만남을 이어가던 중 6번째 만나는 날은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에 친한 동기들과 학교 앞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친구들에게 미리 이렇게 일러두었다.


"야, 나 이따가 남자친구 데려간다~"

"헐? 너 남자친구 생겼어?"

"응 얼마 안 됐어ㅋㅋ 이따가 오빠 잠깐 들르라고 할게~"


-


단장 오빠에게는 그날 점심을 같이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이따가 친구들이랑 고기 먹기로 했는데 잠깐 같이 들러서 인사나 하고 가지 않겠냐고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들은 우리 봉사단도 아니고 오빠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 자리에 들러 인사를 하라는 것이 이상하게 들렸을 법도 하다. 그런데 오빠는 웬일인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커피를 마시고 저녁까지 시간이 남아 우리 학교 교정을 산책하면서 교내에서 제일 높은 언덕에 올라가 우리는 바위에 나란히 앉았다. 학교 건물과 동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그곳에서 도시 불빛을 바라보며 바람을 쐬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어 엄마다, 오빠 잠깐 전화 좀 할게요?"


엄마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던 중, 꼬고 있던 내 오른 다리 발목 쪽에서 누가 살살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뭐지 하고 쳐다보니, 풀린 내 운동화 끈을 단장 오빠가 조용히 묶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그때의 나는 길 가다 여자친구 신발끈 풀어진 거 보고 주저앉아 묶어주는 남자친구에 대한 구체적인 로망이 있었다.(이런 로망 가졌던 분들 많을 듯) 그런 나에게 깜빡이도 없이 들어온 그의 심쿵 행동.




떨린 마음을 추스르고 언덕에서 내려와 우리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내가 남자친구를 데려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친구들 생각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얘들아 나 왔어 ㅋㅋ"

"어 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


사실 단장 오빠는 둘이 있을 때는 다정한 편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다. 처음 보는 자리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오빠를 처음 만난 회식 자리에서는 큰 목소리로 떠들며 웃옷을 벗는 시늉을 했었지만.. 정말로 그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경상도 남자 중에서도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런 그가 본인과 전혀 관련 없는 내 친구들을 소개받는 자리에 선뜻 나와 주었다는 건 나중에 생각해보니 하나의 시그널이었던 것 같다.


사달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내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발생했다.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오는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과 단장 오빠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역으로 내게 만우절 장난을 치려는 꿍꿍이를 가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뭔가 수상했지만 별 신경 쓰지 않고 고기를 먹고 우리는 헤어졌는데, 나중에 사귀고 나서 듣고 보니..



(내가 화장실 간 사이)



"오빠, OO랑 언제부터 사귀신 거예요? OO 어디가 좋았어요???"


'... 나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한 건가?'


"아,  저희 사귄 지 얼마 안 됐어요ㅋㅋ OO 밝고 예뻐서 좋아했죠"


-


내가 친구들한테 본인을 남자친구로 소개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단장 오빠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예스!" 






그 후로도 열심히 신발끈을 묶어주던 그. 물론 지금은 안 함.






그때만 느낄 수 있었던 감성의 연애 스토리, 총 15화 분량의 브런치북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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