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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브 Dec 25. 2022

니 내 여자친구 해라

(6) - 뒤통수에 대고 고백하는 남자

"오빠, OO랑 언제부터 사귀신 거예요? OO 어디가 좋았어요???"


'... 나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한 건가?'

"아,  저희 사귄 지 얼마 안 됐어요ㅋㅋ OO 밝고 예뻐서 좋아했죠"


친구들에게 만우절 장난을 치려던 게 그렇게 뜻하지 않게 그에게 확신을 주는 계기가 되어버린 여섯 번째 데이트였다. (이 이야기는 사귀고 나서도 꽤나 한참이 지나서야 그에게 들었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




반대로 일곱 번째 데이트는 내가 그의 마음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도 낮에 둘이 점심을 먹고 놀다가 저녁에 봉사단 조모임이 있었다. 우리 조와 그의 조는 서로 아는 사람이 많아 봉사단의 10개 가까이 되는 조들 중에서도 유독 조인해서 노는 경우가 잦았고, 서로 다 친했기 때문에 우리 둘 사이를 의심하거나 추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지난번 <금요일에 만나요>를 부른 날 저녁 회식 장소와 같은 지하 벙커 술집에서 회식을 했는데, 자리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나는 현금을 뽑으러 ATM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 당시가 내 기억에 카카오페이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즈음이라 다들 계좌이체나 온라인 송금보다는 현금으로 1/n을 지불했던 것 같다 (대학생이었어서 그랬을 수도). 아무튼 우리 조 조장 오빠에게 ATM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단장 오빠가 자기도 돈을 뽑아야 한다고 따라 올라왔다.


둘 다 적당히 술을 마셔 기분 좋은 상태로 ATM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단장 오빠가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키 차이가 꽤 나는 우리였기에 자세는 아주 자연스러웠고 유일하게 편하지 않은 건 두근대는 내 마음뿐이었다. 술기운이었을까? 술기운의 도움도 분명 있었을 거다. 나는 내게 어깨동무한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첫 스킨십이었고 둘 다 떨렸지만 원래 이런 사이였던 것처럼 둘 중 누구도 의아해하지 않은 채 그 상태로 계속 걸었다.


근처 편의점 바깥에 위치한 사설 ATM에 도착했다. 보통 편의점 앞에 있는 ATM은 보안을 위해 날개 모양의 플라스틱 가림막이 양쪽에 달려 있다.


 

사진출처: 케이뱅크 블로그



서로 어깨와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고 내가 먼저 사진 속 여성분처럼 현금을 뽑고 있는데, 내 뒤에 서있던 단장 오빠가 ATM 가림막을 하나씩 양손으로 턱, 잡았다. 마치 그의 품 속에서 돈을 인출하고 있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나는 너무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돈을 다 뽑고 이만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바로 뒤에 오빠가 서 있다는 것을 알기에 차마 뒤를 돌 수 없었다. ATM을 바라보는 방향 그대로 옆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가림막을 굳게 잡은 그는 팔을 치워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 어깨 쪽에 얼굴을 가져와 본인의 현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조금은 유치한 인터넷소설 속 여자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장이 너무 떨려 거기서부터 술집까지는 다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그때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내가 술에 취해 비틀거려 주저앉을 것 같아 지탱해 주려고 했다는데 맹세코 나는 취하지 않았었고, 취했다 한들 이미 어깨동무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어 술이 깼을 것이다. 결혼을 한 지금까지도 그는 본인이 저 때 다른 의도로 이런 행동을 했다고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다. ㅋㅋ


아무튼, 단장 오빠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준 7번째 만남이었다.




8번째 만남에 우리는 초저녁에 근처 호수공원을 산책했다. 그 무렵에는 카톡도 매일 하고 있었고(여전히 직접적인 달달한 대화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지난번 ATM 사건을 기점으로 나는 우리가 이미 다 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아직까지도 고백을 하지 않는지 조금 짜증까지 날 무렵, 일이 벌어졌다.


호수공원에는 위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주 좁은 계단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좁아 한 사람씩 일렬로 줄을 서서 올라가야 하는 계단이었다. 내가 앞장서고 단장 오빠는 내 뒤에 서서 한 칸씩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한참 이야기를 하던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무언가 머뭇거리는 듯한 느낌이 내 뒤통수를 날카롭게 강타했다.


"..ㅇㅇ야."

"네?"





"니 내 여자친구 해라."





뇌정지가 왔다. 너무도 기다렸던 고백이었지만 내 뒤통수에 대고 고백이라뇨? 아직 올라가야 할 계단은 한참 남았고 난 저 계단 끝에서 오빠 얼굴을 민망해서 어떻게 보죠..?


"어.. 어...?"


쐐기를 박는 듯 단장 오빠는 순도 100% 경상도 사투리로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니 내 여자친구 해."


-


결국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계단을 다 올라왔고 자연스럽게 오빠는 나와 마주 보고 서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도저히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그렇게 뱉는다고 뱉은 말이


"아, 안 돼요 오빠! 계속 제 뒤에 있어요!"

"어..?"


-


믿기 어렵겠지만 그렇게 계속 앞뒤로 선 상태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걸어 집 갈 버스를 타는 정류장에 도착했다. 바로 집에 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일단 정류장으로 향해 버린 것이다.


"저.. 그래서 대답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어.. 그게.. 내일 카톡으로 대답해도 돼요..?"


21세기 최악의 고백 답변이 아닌가? 지금이 아니라 굳이 내일, 그것도 카톡으로 대답하겠다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니 사실 머리가 하얘져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내 대답은 "YES!" 였지만 왜인지 너무 부끄러워 그저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만 싶었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을 내뱉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멀뚱히 서 있는 내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고는 오빠가 말했다. 안 된다고, 지금 말해달라고. 잠시 눈을 피하다가 나지막이 내가 대답했다.


"그래!"


둘 사이에 민망한 웃음이 터져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내가 탈 버스가 왔다. 그날은 지갑을 잃어버리지도 않았는데 단장 오빠는 나와 같이 버스를 탔고, 양 옆에 나란히 앉자 오빠가 내 손을 잡았다. 손에 너무 땀이 났지만 뺄 수 없었다. 그렇게 남자친구와 여자친구가 된 첫 날도 단장 오빠는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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