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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빈슨 크루소 Apr 22. 2023

축구경기에서 우승하다

행복했던 수요일 오후의 기억

나는 잠자기 전 늘 다음 날 아침 조회시간에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을 생각하곤 한다. 

나는 조회, 종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아이들이 늘 단정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서 듣도록 한다. 

신규 교사 시절엔 아침 조회, 종례에 일어나는 일련의 행위들이 매우 권위적인 행동으로 생각되어 아이들이 자리에 앉건 말건 조금 분주해도 얼른 내가 할 말만 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점점 아이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가정통신문 회수가 안 되는 건 물론이고 화장실에 가 있느라 그 시간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조차 있었다. 한 번은 아침 조회 때 학생 출석 파악을 미처 다 하지 않아 무단 결석한 학생이 학교에 오지 않은 사실을 4교시가 되어서야 알게 된 적도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매년 반대항으로 축구경기를 하고 있는데 남자 학교다 보니 축구 리그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이 지대해서 그 경기에 이기느냐 지느냐는 아이들의 자존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지난주 화요일 밤엔 다음 날 아침 조회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특별히 고민이 되었는데 수요일에 한 달 전부터 우리 반과 옆반과의 축구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반과 첫 경기를 하게 된 반은 마치 축구 경기를 위한 반편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작년 축구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던 각 반의 선수들만 모아놓은 일명 축구로 하나 되는 반이었다. 첫 경기부터 그런 반을 대상으로 경기를 하게 되었으니 아이들에게 응원의 말을 하자니 상대팀의 전력이 너무 막강하고 위로의 말을 하자니 시작부터 아이들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같아 고민이 되었다. 우리 반 아이들조차도 이 경기는 무승부 정도로만 끝이나도 아주 잘한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25명의 학생들 중에 11명-13명의 학생들이 경기에 출전 또는 후보로 활약을 하게 되니 학급의 절반 정도가 선수로 활약을 하는 셈이다. 


우리 반 반편성을 하고 난 직후 우리 반 명단을 훑어보니 작년에 축구를 꽤 잘했던 박지후라는 학생이 눈에 띄어 "지후야, 우리 반이 이번에 축구리그 잘할 수 있을까?"하고 물어보았더니 "아뇨, 작년 리그 때 축구 경기에 참여를 해 본 아이들도 몇 명 없어요."라고 말하며 실망하던 모습을 보였다. 나는 남학교에 오래 근무한 사람으로 운동에 열정을 가지는 아이들이 얼마나 축구에 진심인지 잘 알기 때문에 나 또한 경기에 관심을 가지고 모든 경기를 관람하고 때로는 음료수도 사비로 사주고, 영상촬영도 해 주는 나름 열혈담임이다. 작년과 재작년엔 내가 담임했던 학급이 축구리그 1등을 했기 때문에 이 경기가 1년간 아이들의 사기진작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주는지 잘 알고 있다. 

어쨌든 작년까지는 실력으로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밀려 한 번도 축구 경기에 참여한 경험이 없던 아이들이 상당수 축구선수로 포함되어 우리 반 선수단이 꾸려졌다. 




수요일 아침이 되었다. 

나는 어제부터 고민하던 말을 하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얘들아, 선생님이 몇 년 전에 보았던 가장 아름다웠던 축구 경기에 대해 이야기해 볼게. 


그날은 비가 왔고 우리 반 아이들은 열심히 뛰었지만 후반전 막바지에 1:0으로 지고 말았지. 아이들이 너무 열심히 뛰느라고 두 명이나 부상을 당해서 선수를 교체하고 나머지 아이들도 너무 지친 상태였어. 경기가 끝나고 경기에서 진 아이들이 너무 지쳐 어깨가 축 늘어져 운동장 바닥에 퍼질러져 앉아 있는데 그때 선수로 같이 뛰었던 반장이 일어나더니 아이들 등을 토닥이며 아이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보이더라고. 그러다가 몇몇 학생들이 더 일어서서 서로를 일으켜주면서 11명의 아이들이 서로 다독이며 걸어오는데 아이들이 그때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단다. 아이들이 축구 경기에 지면 서로 비난하느라 마음 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날의 경기는 졌지만 이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 경기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학습적인 지식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체육활동을 통해서 협동심, 배려심, 또는 이런 아름다운 스포츠맨십을 배울 수 있다면 경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기에서 이기고도 서로를 비난하느라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있고 경기에 졌더라도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훈훈한 경기도 있단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희가 아무도 다치지 않게 안전하게 경기에 임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경기 자체를 즐기면서 서로 팀워크를 맞춰가며 좋은 경기를 하는 거야." 


점심시간이 되었다. 4교시에 수업이 없을 때 일찍 식사를 하고 아이들 축구 경기를 촬영할 셀카봉과 영상촬영용 핸드폰을 준비했다. 점심시간에 축구경기를 관람하고 5교시 수업을 바로 가야 하므로 5교시에 필요한 수업 준비물도 챙기고 양치를 하고 조회대로 갔다. 수업 직후에 식사를 해야 할 아이들이 전부 점심을 먹지 않고 스탠드에 앉아 유니폼을 고쳐 입고 몸을 풀고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경기에 참여하는 아이들 중에는 먹성이 상당히 좋아 급식을 2번씩 먹는 학생이 있는데 그런 아이가 점심도 먹지 않고 경기를 준비하는 걸 보면 이 경기가 아이들에겐 정말 중요하긴 한가 보다. 




경기가 시작되고 모든 학교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관람하는 아이들은 경기를 보며 다양한 예상 스코어를 내놓았는데 2:0, 4:0 등 당연히 우리 반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반부터 상대팀의 공의 점유율이 높아지고 몇 번의 슈팅이 있었으나 골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골대로 가는 공을 우리 반 골키퍼가 여유 있게 몇 번을 막아냈다. 공은 계속 우리 반 골대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상대팀 골키퍼는 할 일이 없어 한동안 골대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여유도 보였다. 


공은 상대팀의 아이들이 훨씬 많이 점유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열릴 것 같았던 우리 반의 골문이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상대편의 공격수의 공이 골로 연결되려고 하면 누군가가 와서 계속 흐름을 끊어놓았고 양쪽 다 팽팽하게 전반전이 끝났고 나는 경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너무 잘 버티고 있어. 조금만 더 버텨보자!!"

나의 이 말에 함께 경기를 함께 보던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후 후반전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상대편의 골문도 쉽게 열리지 않았지만 우리 팀의 수비도 만만치 않게 탄탄했다. 공을 뺏기 위한 몸싸움이 계속되고 우리 반 공격수 아이들이 몇 번의 도전 끝에 드디어 슛을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와서 지후가 한 골을 넣은 것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 영상촬영을 하던 셀카봉을 떨어뜨릴 뻔했다. 관중들의 환호가 이어졌고 경기를 하던 우리 반 아이들은 마치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이제부터는 후반전까지 시간만 잘 끌면 우승을 할 수도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4:0으로 질 거라고 예상했던 최약체 우리 반이 우승후보인 팀을 대상으로 무려 한 골을 넣다니. 오늘 아침시간의 위로 같던 나의 멘트는 우스운 걱정이었다. 


상대팀에는 우리 학교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고 모든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선수인 재영이가 있다. 재영이는 키가 180cm에 몸무게도 90kg에 육박하여 몸싸움에 능하고 축구 기술도 좋아 작년 축구리그 1등을 했던 우리 반 아이들이 가장 견제하던 대상이었다. 후반전이 되자 재영이가 조급한 마음에 계속 우리 팀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골대를 피해 가던 그때 올해 축구 첫 출전인 진형이가 상대팀 골문에 비스듬히 슛을 날렸는데 아무도 견제하지 않았던 탓에 그대로 골이 들어가 버렸다. 

경기하던 아이들도, 구경하던 우리들도 우리 팀 골을 인정하는 심판의 호각소리에 "뭐라고?, 골이 들어갔다고?" 어리둥절하다가 좋아라고 얼싸안는 우리 반 선수들을 보고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던 축구 최약체 우리 반은 올해의 우승 후보반이었던 옆반을 2:0으로 누르면서 승리에 쐐기를 박게 되었다. 후반전 말미에 상대팀이 코너킥을 몇 번 시도했으나 우리 반 골키퍼가 여유 있게 막아내면서 경기는 종료되었다. 



승리를 얻고 유유히 조회대를 향해 걸어오는 아이들의 미소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우승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기뻤던 경기였다. 응원하던 아이들은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에게 달려가 하이파이브를 하고 손을 잡아주고, 때로는 안아주면서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득점을 했던 지후와 하이파이브를 한 번하고 몇몇 아이들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나는 다음 수업을 위해 음악실로 갔다. 




7교시에는 창체(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이었는데 그날은 사이버 폭력 예방 방송 교육이 있는 날이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아이들은 이미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경기 직후에 나는 다른 학년 수업을 하러 가는 바람에 제대로 아이들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못해줘서 나는 잠시 방송 볼륨을 죽인 후에 

"얘들아. 우리 축구에 이긴 기념으로 크게 박수 한 번 칠까?" 


아이들은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고 그 순간 조금 미안하지만 옆 반에 들으란 듯 아이들은 더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 내내 우리 반 아이들은 옆 반 아이들의 "4대 0으로 이겨줄까, 6대 0으로 이겨줄까"라는 종류의 다양한 조롱을 듣고도 공공연하게 반박 한 번 못했기 때문에 그 순간 너무나 시원한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 함께 웃으며 박수를 치던 그 순간이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이었다. 



Behind Story


1. 우리 반의 유망한 공격수 지후는 사실 경기 전날부터 허벅지에 통증이 심해 다음 날 경기를 위해 병원을 방문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무리한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한 상태였다. 어제 병원에 방문했던 것을 알았던 나는 지후에게 아쉽지만 이번 경기는 뛰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니 오늘 경기는 다른 아이들에게 맡기라고 했으나 나중에 점심시간에 가 보니 지후는 밥도 먹지 않고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후도 나의 말에 이성적으로는 동의하나 운동에 진심이고 장래 체육교사가 되고 싶어 하는 이 아이에게 이 경기는 너무 중요했던 것이다. 지후도 담임교사로서 본인의 걱정하는 마음을 알기에 내 눈치가 보여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선생님, 살살 뛸게요. 제발요. 무리하지 않을게요." 지후를 한참 바라보던 나는 '지후야, 네가 뛰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학부모님의 원망은 내가 다 듣는단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한 후에 지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병원에서 지후에게 무리해서 운동하면 안 된다고 했다는데 계속 경기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네요. 어떡하죠?" 잠시 고민하던 지후 어머니는 "선생님, 지후가 잘 조절할 수 있을 겁니다. 경기 나가게 해 주세요." 나에게도 고마운 어머니의 말씀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지후는 날개를 단 듯 경기에 나갔고 우리 반에게 첫 골의 승리를 안겨주었다. 


2. 아이들의 경기를 녹화해서 영상 편집을 하다 보니 재미있는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경기당일엔 골을 넣은 아이들과 드리블하는 아이들만 눈에 들어왔는데 상대편의 공이 우리 골문으로 갈 때마다 계속 흐름을 끊어놓는 수비수들이 있었다. 경기할 때는 너무 순식간이라 잘 보지 못했는데 영상을 편집하다 확대해서 보니 수비수 7~8명들이 부지런히 따라다니고 여기저기서 계속 골을 주시하고 상대편이 골을 넣지 못하도록 계속 막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경기에 뛰었는지 조차 몰랐던 아이까지 2~3회 정도 수비를 하며 경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저 우연이고 요행이라 생각했던 우리 반의 승리의 비밀은 사실은 조용히 자기 역할을 하는 아이들의 엄청난 노력에 있었던 것이다. 

영상 편집을 끝내고 경기에 참여했던 아이들에게만 영상 공유를 해 주었는데 편집이 꽤 마음에 들게 되어 나도 몇 번씩 더 들여다보았는데 11명에게만 공유해 주었던 영상이 일주일이 지난 지금 조회수가 130회가 넘은 걸 보니 아이들도 생각날 때마다 그날을 떠올리며 영상을 가끔씩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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