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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주

만년 대리 방대리의 어느 하루

by 오스만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15


금요일 밤 11시. 직원 모두가 퇴근하고 떠난 텅 빈 사무실 한편에 남아 혼자 불을 밝혀 모니터 앞에 앉은 B기업 방대리가 컵라면을 청승맞게 먹고 있다. 젓가락 가득 집은 면발을 후루룩 거리며 입안에서 우물대던 방대리의 눈이 순간 동그래 졌다.


"내일의 운세라... 뜻하지 않은 귀인을 만나니 동남풍에 봄꽃이 만개하는구나. 봄기운에 몸이 귀함을 얻게 되니 그간의 묵은 근심이 눈처럼 녹으리라... 로또나 하나 사 볼까?..."


지방 국립대학 졸업 후 'B 기업'에 처음 입사할 무렵만 해도 방대리에게는 꿈이 있었다. 국내 굴지의 기업이었고 전문 경영인 체재가 어느 정도 정착된 탄탄한 기업 구조에 사회적으로 평판이 매우 좋아 '대학생들이 입사를 선호하는 10대 기업'에 5년 연속으로 빠짐없이 선정되었던 탓이었다. 주변에서 축하는 또 얼마나 받았던가?


지금도 가끔은 그 당시를 회상해 보면서 방대리의 어깨에 힘이 불끈 들어가곤 했다. 입사 경쟁률 18:1을 뚫고 당당히 공채 입사한 자신이 아니던가? 공무원 취업을 바라시던 부모님도 은근히 지인들에게 아들 자랑을 하고 다니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왠지 효도하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입사 4년 차에 사원 생활을 겨우 벗어나 대리 진급을 했지만 천성이 고지식한 탓인지 매번 인사고과에서 좋은 평점을 얻지 못했고 성격이 싹싹한 동기들이 입사 9년 차에 하나씩 과장 진급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방대리는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진급 누락과 함께 결혼의 기회도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나이도 서른일곱이 되어 있었고 한 두해 늦게 입사한 후배들이 과장 직급을 달고 축하받는 모습을 바라보는 자신이 점점 더 초라해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단지 열심히 일에 매달리는 걸로는 여전히 부족한 것일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이 날도 잔뜩 쌓인 이메일 속에 첨부된 자료들을 뒤지고 있었다.


회사 정문을 빠져나오자 새벽 4시가 이미 넘어 있었다. 가까운 24시 사우나를 방문하여 쪽잠이라도 청해 볼 요량으로 발길을 그쪽 방향으로 바삐 돌리는데 회사 앞 벤치에 우두커니 앉은 한 노인이 새우깡 봉지를 놓고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숙자인가?'하는 생각으로 못 본 척 지나는데 노인이 방대리를 불렀다.


"젊은이... 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나요?"


나긋한 중저음에 상냥함이 잔뜩 배어 있는 말투였다. 고개를 돌려 가벼운 목례를 하는 방대리에게 노인은 빈 잔을 들어 자기와 한 잔만 함께 해주기를 요청했다.


"혼자 하기 적적하네요. 한 잔만 받으세요."


찬찬히 눈여겨보니 말끔한 옷차림에 점잖게 나이가 든 사람이었다. 노숙자의 궁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뭇대는 방대리를 향해 다시 노인이 잔을 권했다.


"그러지 말고 한 잔만 받지요. 어떻게 보면 제가 이 회사의 대선배가 될 텐데 말이죠."


노인의 말에 방대리의 경계심이 급격히 누그러졌다.


'퇴직하신 분인가?'하는 생각으로 얼결에 잔을 받고는 노인이 비워 둔 자리에 앉은 방대리를 향해 노인이 물었다.


"어느 부서에 근무하세요?"


"수출 영업 2부에 있습니다."


"수출 영업 2부라... 중. 아 지역과 유럽 담당이시구먼요.. 허허"


노인의 말에 역시 퇴직하신 선배님이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며 조금 더 방대리의 태도가 깍듯해졌다.


"말씀 낮추세요. 선배님이신 듯싶은데요."


방대리의 권유에도 좀처럼 노인은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


"고생하시는 분께 막 하대를 할 수는 없지요. 무슨 일로 이 시간까지 늦게 남으셨어요?"


"네. 돌아오는 월요일 주주총회라 저희 사업부 3/4분기 실적과 4/4분기 예정 보고서를 준비했습니다."


"허. 허.. 그러셨구먼. 나이 때를 보니 과장 정도 되시는 듯싶은데."


살짝 얼굴을 붉힌 방대리가 머뭇대며 대답했다.


"아. 네. 아직 대리입니다. 진급할 때가 훌쩍 지났는데 부끄럽네요."


살짝 고개를 돌려 말을 마친 방대리가 잔에 있던 소주 한 잔을 비우자 노인이 다시 병을 들어 한잔을 더 채웠다.


"그러셨구먼..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이 아직 진급이 안되셨다니. 회사가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요? 내가 현직에 있을 때만 해도 헌신하는 직원들에게는 골고루 보상이 돌아갔습니다만..."


노인의 말에 방대리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 들었다.


"별말씀을요. 제가 많이 부족한 탓이죠."


노인이 방대리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새우깡 몇 개를 집어 방대리에게 권했다.


"그래. 이렇게 매번 밤을 지새우며 근무를 하고 있나요? 몸이 많이 축날 텐데... 젊을수록 몸 관리를 잘해둬야 하는 법이라오."


애써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방대리에게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나 또한 젊은이 같은 시절이 있었다오. 그때는 가슴속에 희망이 있었거든요. 가난한 조국에서 태어나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가 없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일에 매달렸지요. 내가 잘되는 것이 회사가 잘되는 것이고 회사가 잘되는 것이 조국이 잘되는 것이라는 마음속의 신념이 나를 버티게 했었지요. 그러고 보니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허허..."


방대리가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살아오신 분을 노숙자로 생각했으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님 같은 분들이 그렇게 헌신하신 덕분으로 저희 같은 후배들이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된걸요. 더 노력해서 회사의 성장에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송구스럽습니다. 선배님. 실례지만 어느 부서에 계셨는지요?"


"허. 허.. 부서랄 게 뭐 있나요. 뭐 워낙 처음 구멍가게 같은 회사에 합류를 한 탓에... 그나저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것도 인연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두고 싶군요."


노인의 말에 방대리가 양복 윗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명함 한 장을 두 손으로 건네었다.


"방. 재. 원 대리님... 참 좋은 이름이군요. 난 가끔 생각이 나면 이렇게 여기 앉아 술 한잔을 하고 간다오. 처음에는 동료들 몇 명이 함께 모였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씩 저 세상으로 떠나더니 결국 나만 남게 되었네요. 허허.. 아무튼 반갑고 더 열심히 일해 주세요. 건강도 돌보시구요."


노인은 남은 병의 소주를 마저 잔에 부어 방대리에게 건배를 제안하더니 잔을 비웠다. 빈 병과 과자 봉지를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넣더니 벤치 옆에 놓인 휴지통에 집어넣고는 방대리에게 악수를 청한 뒤 뒤를 돌아 가로등 불 빛 아래로 사라져 갔다.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한 방대리가 주주총회에 사용될 자료를 서둘러 챙겨 제출하고 한숨 겨우 돌릴 무렵 휴대폰으로 전화가 한통 왔다. 인사부에 근무하는 입사동기 오 과장이었다. 좀처럼 왕래가 없던 사이라 다소 의외라는 생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재원아. 너 어디 있냐?"


그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어. 어. 그래. 대팔아.. 잘 지내지... 사무실인데... 왜? 무슨 일인데?"


"야. 오늘 주총이라 대주주 회사 방문했는데 아침부터 인사담당 천상무 불려 가고 난리 났어. 그런데 왜 대주주가 너 인사 파일을 가져오라고 그러는지 너 혹시 뭐 아는 거 있냐?"


"... 무슨 홍두깨 같은 소리야. 내 인사 파일을.. 금시초문인데..."


"아.. 됐고.. 알았어. 너 혹시 사고 친 거 있나 해서 전화해 본거야. 정말 별 일 없었지?"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오후 주총이 무사히 끝나고 퇴근 무렵이 되어 방대리가 부서장인 김 부장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이 방과장? 축하해. 당신 그런데 배길우 대주 주님하고 무슨 사이였나? 왜 그분이 당신을 직접 챙겼다는 이야기를 인사부장이 내게 묻는 거지? 오늘 약속 없으면 나랑 저녁 같이 하도록 하지. 내가 진급 축하주 한 잔 근사하게 살 테니... 다른 약속은 다 취소하는 거야. 알겠지? 이 사람.. 허.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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