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 2R 38 PAV X1000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 욥기 12:11
나는 어릴 때부터 반찬투정을 하는 아이였어. 엄마가 해 주시는 반찬에서 내가 먹기 싫은 것들을 포크나 수저로 하나씩 골라내고 있으면 엄마는 나를 빤히 지켜보시다가 이내 버럭 화를 내시곤 했지. 그리고는 예외 없이 잔소리를 시작하셨어.
"몸에 좋은 것들을 왜 먹지 않니? 먹고 싶지 않은 음식도 균형 있는 영양 섭취를 위해 억지로 먹어야 한다"
특히 나는 당근이나 오이를 아주 싫어했는데 특히 오이는 입에 넣는 순간 바로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지.
학교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아이들이 반찬을 나누어 먹었는데 나는 이 시간이 무척 고역이었어. 한마디로 내 입에 맞는 반찬을 찾아내기가 매우 힘들었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나는 외톨이가 되어 버렸어. 매 학기 초에 같은 반 아이들은 이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기들끼리 수군대다 힐끔 나를 쳐다보곤 했지만 그들도 이내 익숙해지더군. 더군다나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혼자만의 식사시간을 가지는 것이 내겐 너무 편안하게 느껴졌어. 예의상 누군가를 의식해 억지로 삼킨 반찬으로부터 비롯된 구토를 피할 수 있었으니까.
나이가 들어도 나의 이런 음식에 대한 성향이 변하지 않자 부모님의 걱정은 점점 더 커져 가셨지. 서울 시내 유명하다는 한의원이나 대학병원을 방문해서 검진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성장기에 겪을 수 있는 현상이라 나이가 들면 자연히 식성이 변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그들의 의학적 소견이었어.
물론 난 동의할 수 없었지만 말이야. 아무튼 어른들이 걱정을 하시니 나도 내 식성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 하지만 '클라크 켄트(슈퍼맨)'가 크립톤 운석에 맥을 못 추듯이 내 식성의 변화는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었어.
그런데 말이지. 주변에서 자꾸 이상하게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니까 이게 또 나의 콤플렉스처럼 되고 말았어. 특히나 대학교를 휴학하고 군대를 갔는데... 어땠겠어? 당연히 '관심사병'으로 등록이 되었겠지. 웃기는 일이쟎아. 단지 먹기 싫은 걸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심사병이 되었으니 말이야.
어휴... 그 시절 얘기는 그냥 그만 하도록 하자. 생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했는데 이제는 회사에서도 눈총을 받게 되었지. 뭐. 그렇잖아. 부서 회식을 신입사원 입 맛에 맞춰 주는 회사가 어디에 있겠어? 구박을 많이 받았지. 특히 남의 속도 모르면서 여직원들이 나를 무슨 '마마보이' 정도로 여기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더군.
해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이 있듯이 뭔가 나 스스로가 '자구행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의외로 나와 같은 식습성을 가진 이들이 더러 있더군. 나는 관련 카페에 회원으로 등록을 마치고 며칠 뒤에 예정되어 있는 '번개모임'에도 참석을 신청했지.
회비가 다소 비싼 편이더라. 이유가 뭔가 선별된 음식으로 모임에 참석한 회원들을 대접한다고 되어 있었어. 묘한 호기심과 함께 같은 부류의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는 설렘이 생기더군. 며칠 후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퇴근시간과 동시에 회사를 빠져나와 역삼동 과학 기술회관 근처로 발길을 향했지.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한정식 전문점이라는 상호가 붙어 있더군. 입구에 보니 천연 조미료를 사용하고 유기농 농작물만 사용....이라고 적혀 있었어. 한마디로 '비싼 집'이라는 얘기지.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 서자 다섯 명 정도가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는 자리에서 한 명씩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더군.
나도 엉거주춤 명함을 한 장씩 돌리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지. 왠지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어. 그냥 괜한 웃음이 나와 눈치를 보며 참고 있었지. 솔직히 우습잖아. 식습성이 까다로운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게다가 진지하기 까지.
단지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고 친목을 다지는 그런 자리로 생각을 하고 왔는데 나의 생각이 여지없이 빗나간 걸 바로 알았지. 모임의 회장과 부회장이 보여 주는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고 곧이어 들어오는 음식 하나하나에 대한 서로의 품평이 시작되었어. 예를 들면 죽이 나왔는데 주 재료가 뭐고 첨가물이 어떤 종류인지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는 식이었지.
내 의견을 묻길래 생각하지 않고 '생강 맛'이 난다는 이야기를 했어. 아주 미세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바로 그 향이 느껴졌거든. 부회장의 눈이 순간 커지더니 안경을 고쳐 쓰고는 회장의 눈치를 보더라. 물론 나의 착각이었겠지. 생강이 들어가는 죽이 있으려고. 괜히 말해놓고도 멋쩍어지더라. 그런데 회장이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부르더니 뭐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종업원이 지배인과 주방장을 대동하여 방으로 들어 오더군.
죽을 손으로 가리키며 생강이 들어 있는지 묻는 회장의 질문에 주방장은 깜짝 놀라는 눈치였어. 그리고 이내 대답을 하더군.
"소화 촉진을 돕는 생강의 한방적 효력을 이용하여 식사 전에 미리 속을 릴랙스 해주는 극소량의 생강 효소가 첨가된 건 맞지만 무향. 무취로 가공 처리되어 죽 본연의 맛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강이 들어간 걸 어떻게 아셨죠?"
회장은 주방장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다 잘 알겠으니 다른 음식들도 내어 달라고 요청을 하더군. 전체적으로 음식은 무난한 수준이었어. 물론 무난하다는 내 표현이 음식이 아주 맛있다거나 내 입맛에 아주 잘 맞았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아.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난 음식에 관해 맛을 음미하며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거든. 항상 입안으로 가져 간 음식의 성분을 분석했다고나 할까. 뭔가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걸 걸러내고 삼키는 작업이었을 뿐이었지.
식사가 끝나자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 간에 인사를 나누고는 다음 모임에 대한 덕담을 주고받으며 헤어졌지. 밤 11시가 가까운 시간이라 다소 빠른 발걸음으로 지하철 입구를 찾아 막 계단을 내려서려던 찰나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하고 치는 게 느껴졌어. 돌아보니 방금 전 모임의 회장과 부회장이었지.
집이 어디냐고 묻더니 자기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더군. 사양하는 나에게 긴히 할 이야기도 있다며 강권을 해서 하는 수 없이 부회장과 함께 세명이 한 차를 타게 되었지. 식사를 함께 한 사이긴 했지만 어쨌든 처음 만난 처지라 한 차를 타고 움직이는 게 불편하게 느껴지더군. 회장과 부회장은 애써 말을 거는 등 나와의 어색함을 줄이기 위해 애를 쓰는 듯 보였어.
그런데 문득 창 밖을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어. 세상이 험악하다 보니 살짝 겁이 난 건 사실인데 그들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겠더군.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둘 다 무표정하게 나를 외면하고 있었거든.
차가 도착한 곳은 다소 외진 장소의 5층 건물이었어. 자세한 장소는 말을 해 줄 수가 없는데 그건 그들과 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야. 계단을 이용해 3층으로 올라가자 칸막이가 여러 개 있는 평범한 사무실 공간이 나왔어. 입구에서 만난 양복 입은 남자가 나를 회의실로 안내했고 회장과 부회장이 잠시 후 들어왔어. 회장이 부회장을 쳐다보자 부회장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며 입을 열었어.
"오늘 저녁 식사를 했던 장소는 사실 우리 회사가 운영하는 실험실입니다. 우리 회사는 최근 폭증하고 있는 중국에서의 마약 밀반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그간 고심해 왔습니다. 갈수록 그들의 수법이 지능화되고 있어 우리 회사가 적절하게 대응하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해서 우리 회사는 각 분야 별로 특별한 능력이 있는 국민을 특채 형식으로 채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가 금일 테스트한 결과 귀하의 미각 능력은 'TAS 2R 38 PAV X1000'에 해당하는 것으로 측정되었습니다. 일반인의 '7번 염색체'가 가진 미각 능력에 비해 1,000배 더 맛에 민감하다는 의미죠. 귀하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다면 빠른 시일 내에 입사 처리하여 현업에 투입할 예정입니다. 내주까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리지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우리 회사에서는 귀하의 열정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되었냐고. 요즘 난 중국에서 수입되는 백주(바이 주)를 '샘플링'하는 일을 하고 있어. 그 안에 '필로폰'이 섞였는지 확인하는 일이지. 물론 더 전문적인 건 말해 줄 수가 없어. 우리 회사의 규정에 위반되는 일이니까.
그리고 우리 회사는 회식 같은 게 없는데 무엇보다 그게 가장 맘에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