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에 진리란 없다

by 오아시스
월급을 받으면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실무 총책임자였던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1962)은 예루살렘 법정에서 판사가 자신이 한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이 재판은 전 세계로 생중계가 되었는데 재판이 시작되기 전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극악무도한 악마의 형상을 한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TV앞에 모습을 드러낸 아이히만은 사람들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수백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전범이라고는 상상도 안될 만큼 너무나도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인면수심의 전범자 아이히만은 1962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법정에 선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수행했던 충직한 직장인이자 가정에서는 자상한 아빠와 남편이었던 아이히만의 모습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에 충격에 빠졌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사람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권한이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습니다. 크건 작건 어떤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나의 행동이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닙니다. -아이히만의 법정 증언 中


아이히만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총통의 말이 곧 법적 효력을 갖는 시대에 살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권력자와 조직을 위해 몸 바쳐 충성하는 성실성을 발휘했다. 아이히만의 이러한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명령과 지시에 대해 옳고 그림을 따지지 않음으로써 발휘되는 무조건적 성실성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그가 명백하게 유죄인 이유를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고, 성실한 시민으로서 조직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정당한지 부당한지, 사고하고 판단할 수 없는 무능력 즉, 무사유(無思惟)가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사유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자신의 모순적인 행동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능력도 철저하게 상실했다. 결과적으로 사유 능력의 결핍은 반성 능력의 결핍으로 보편화되고 일상생활에서 순식간에 엄청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무사유는 지식이 많거나 소위 스펙이 좋은 것 또는 지위가 높은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아렌트는 법정에서 만난 아이히만을 쭉 지켜보면서 “그는 사적으로는 가정에 충실하고 공적으로는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평범한 시민이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아마도 수백 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가두고 무참하게 학살한 그날 밤에도 그는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아이히만이 일상에서 보여준 평범함과 관료적 성실함은 그를 무조건 나쁜 인간으로 일컫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렌트는 이러한 인간의 평범함에서 나타나는 선악 구분의 어려움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악의 평범성을 통해 아이히만은 지나간 과거의 인간이 아니라 그의 성격과 사고방식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불법적인 비상계엄은 무사유로 인한 악(惡)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평범한 일상인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소위 엘리트 집단 출신이라는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서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권력자의 명령에 무사유로 따랐던 부하들이 하룻밤 사이에 국가와 국민을 위험에 빠트렸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희대의 사건이었다. 일상에서 사유의 부재는 판단의 부재와 연결된다. 의심하지 않는 이성은 당연히 판단을 하지 않거나 정지시키는 의지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의심하지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기 때문에 판단이 개입될 여지 자체가 없다. 명확하게 잘못된 지시임에도 불구하고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지를 판단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학은 자명한 이치에 대한 반항이다. 만약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면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다. 인간의 이성은 그 어떤 불의한 목적에도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한 욕망의 의지와 어깨를 견줘서도 안 된다. (...) 이 시대의 철학자들, 혹은 지식인들, 혹은 정치인들, 혹은 종교인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더 많은 의지를 반영하고자 타인의 삶에 억압된 계시를 남발한다. 그들이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 보여주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계시는 결코 우리 스스로 쟁취한 표상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아포리즘》中


우리는 권력이라는 이름 앞에서 자의든 타의든 굴복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나의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권력, 그 자체도 권력자의 의지의 표상일 뿐이다. 그런데 그들의 욕망의 표상인 권력 앞에서 우리 같은 하수인들은 극도의 존경을 표하려고 야단들이다. 자신의 무가치한 행실에 한 점의 반성도 없다. 우리의 삶이 사유하지 않고 그래서 딱히 반성할 일도 없는 그런 평범한 삶인데, 성공과 출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러한 평범함을 벗어나려 좋은 사회의 좋은 시민으로서 오늘도 성실하고 충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렌트가 말했던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철학이란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걸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복지를 실천하는데도 철학이 필요할까? 사회복지에 진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한 걸까? 철학은 사유를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와 그 이유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악이 평범한 시대에 무사유로 일관하는 삶인데 철학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사회복지 일을 하면서 한 가지는 명확하게 깨달았다. 사회복지에 진리는 없다. 아니 진리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까지 난 아마도 사회복지에 진리라고 불릴 만한 무언가가 어딘가에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그토록 철학을 강조하며 살았다. 결과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사회복지사로서 나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래서 수많은 철학서를 찾아 읽었지만, 어떤 책에서도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어떤 철학서에서 사회복지의 진리를 발견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 후에 나의 삶은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았을까? 아마 그럴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게 된 사회복지 진리와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도 다른 나머지 나는 또 홀로 괴로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의 사회복지 현실이 고통인 줄 알면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에 순응하면서―약간의 부정과 의심을 해가면서―살아가는 이유는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회복지 진리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삶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표상이고, 그 자체가 미지의 세계다. 하물며 사회복지를 통해 그러한 타인의 삶의 진리를 깨닫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사회복지의 진리를 깨닫고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이 일을 하는데 기운이 빠질 것 같다. 평생 벌 돈을 미리 받는다면 당장 일할 의욕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무사유의 삶을 살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신의 선물이며, 잘 산다는 것은 철학의 선물이다. 지혜는 영혼의 스승이다. 삶을 영위하는 일은 철학의 과업이자 예술이다. 다만 목표는 오로지 행복한 삶이요,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고 길을 여는 것이 철학이다. - 세네카


아직도 난 잘 모르겠지만, 철학이란 그런 것 같다. 완전한 형태의 진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그건 사회복지 철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학이 있는 실천을 한답시고 방구석에 처박혀 철학서를 읽는다고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복지 철학은 인간을 대하는 태도다. 세네카의 말처럼 철학의 목표는 행복한 삶이다. 행복한 삶이란 걱정이 없고, 지속적인 마음의 평온이 있는 삶이다. 행복한 삶은 사회복지가 추구하는 유일한 목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우리가 사회복지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알쓸복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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