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회복지가 두렵다

by 오아시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춘추전국시대는 일대 혼란의 시기였다. 폭정이 펼쳐지고 전쟁이 일상이 되었다. 세상에는 임금을 시해하는 신하와 아비를 해치는 자식이 생겼다. 문명사회를 가능케 했던 원칙이 무너졌다. 인간의 시대는 종결되고 짐승의 시대가 온 것 같았다. 공자는 이러한 현실을 두려워했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공자의 시대보다 더 상황이 나빴다. 숱한 나라로 흩어져 자웅을 겨루던 춘추시대를 거쳐 7개의 강력한 제후국이 형성되었고, 이들 사이의 패권 투쟁은 극에 다다랐다. 마침내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다가 끝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게 될 상황에 이르렀다. 맹자 또한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나는 이 같은 현실이 두렵다.”


어느 때보다 잘 먹고 잘 살고,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현대 사회를 그 옛날 폭정과 야만의 시대와 단편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사회복지를 20년 넘게 일하며 느끼는 바가 있었으니, 솔직히 나는 지금의 사회복지가 두렵다. 2300년 전 공자·맹자가 보았을 때 내가 너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현장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보면 반복적으로 체감되는 구조적 문제와 동시에 윤리적 위기의 현장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 옛날 야만의 시대와도 견줄 수 있을 만큼 수십 년간 이어져온 패도(霸道)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마치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하는 지금의 사회복지 현실과 그에 편승하여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는 두렵다.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첫 번째 이유는, 왕도(王道)가 없는 사회복지다. 춘추전국시대는 혼란의 시대이긴 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르네상스 시대라고 일컬어질 만큼 새로운 제도와 문화, 법, 통치기술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도덕은 붕괴되어갔다. 맹자는 이러한 인(仁)이 사라진 시대를 보고 참담함에 두렵다고 말한 것이다. 이 같은 맹자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사회복지 현실은 그 때의 사회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복지는 외형적으로만 보면 매우 정교하고 풍요롭다. 물론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또는 개인의 정치적 상황(선거철 등)에 따라 그 풍요로움은 달리 느껴질 수는 있겠다. (어쨌든) 법률은 촘촘하고 제도는 세분화되어 있으며, 정책은 매년 새롭게 설계되고 개편된다. 그러나 사회복지 제도의 중심에 있어야 할 인간의 삶과 고통은 종종 숫자와 지표 속으로 사라진다. 사회복지 제도 안에서 사람은 개개인이 고귀한 삶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수혜자, 관리의 대상, 또는 성과의 대상으로 환원된다. 그에 따른 사회복지 실천은 연민과 공감, 관계의 윤리를 통한 사회복지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 자체의 유지 또는 제도를 만든 자와 실천하는 자의 권력유지와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는 맹자가 비판했던 패도정치의 모습과 흡사하다. 패도는 겉으로 백성을 위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력유지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의 현실이 두렵다.


두 번째는 사회복지의 탈을 쓴 위선(僞善)이다. 사실 인정하기 싫지만 사회복지는 처음 생길 때부터 위선적인 제도였다. 사람들은 살기 좋은 사회를 이야기 할 때 종종 서유럽 복지국가를 예찬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유럽의 사회복지는 19세기 말 독일제국을 건설한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제도다. 당시 독일은 사회주의 운동이 고조되고 노동자 계급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게 되자 급기야 이들을 달래기 위한 회유책으로 복지 정책을 실시한 것이 사회복지 제도의 시작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 독일의 경제부흥과 사회복지의 이면에는 대자본가와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고 식민지 확대와 침탈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근대적 사회복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 영국의 사회복지도 마찬가지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경제발전으로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 현상이 극에 달하자 기득권층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고자 근대적 노동자 복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저 막연하게 유럽의 복지국가를 추종하는 우리나라 사회복지 사정이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우리나라 사회복지가 근대적 제도의 형식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보나마나 당시의 사회복지는 일제가 인도주의적으로 도입한 제도라기보다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조선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시혜적 통제장치였다. 그토록 바라던 해방을 맞이한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두 번에 걸친 군사쿠데타로 강제로 정권을 잡은 권위주의체제하에서 정권유지를 목적으로 9번의 개헌을 단행하는데, 겉으로는 개헌의 목적이 항상 국민의 복지향상이었다. 당시의 사회복지는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한 제도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집단에게 더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으니 처음부터 복지제도에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 그 후로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오히려 지금은 선별적 복지니, 보편적 복지니 하면서 정치적 진영논리에 빠져 사회복지를 대놓고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의 포로가 된 사회복지는 정치적 목적이 달성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잊히고 만다.


정치인들의 위선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보니 그저 그러려니 하겠지만, 더 큰 문제는 실천현장에 있다. 사회복지 실천현장에서 성과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그런데 그 성과라는 것이 삶의 행복이나 복지실천의 목적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에게는 표의 숫자로, 실천가들에게는 실적과 평가점수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게 문제다. 사회복지는 선의(善意)가 아니라 성과달성을 위한 전략이 되고, 권리를 가진 시민은 전략의 실행과정에서 수단이 되고 만다. 민간 법인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조직이 언제부터 관료화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사회복지사는 공무원도 아닌데 마치 공무원처럼 관료조직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스스로 자율성과 주체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사회복지가 무엇인지, 내가 하는 일이 옳은지, 사회복지에 대한 일말의 철학도 사유(思惟)도 없이 그저 위(?)에서―상급자나 담당공무원쯤 되는 사람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일해 오고 있다. 그렇게 사회복지 실천가들은 일상을 구성하는 문명적 조건―조직을 이루고 작동하는 시스템 전체가 조직의 이익(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조건―으로 인해 오늘도 조직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도덕적으로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듯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무사유의 현실이 나는 두렵다.


세 번째는 사회복지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이기주의다. 이는 단순히 사회적 분위기나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현재의 사회복지가 어떤 정치 원리와 인간관을 전제하고 작동하는가에 대한 성찰이자,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철학적 방향성에 대한 문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사회복지의 현실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그리고 맹자가 비판했던 패도정치의 논리와 깊이 맞닿아 있다.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군주들은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끊임없이 부국강병의 술책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안정이 아니라 극심한 혼란이었다. 맹자는 당시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제도의 부족이 아니라 정치의 방향성에서 찾았다. 정치는 존재했지만 패도가 지배했다. 패도정치는 겉으로는 백성을 위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존속과 권력 강화를 최우선에 둔다. 백성은 보호의 대상이기 이전에 착취와 동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백성들은 무지했을 뿐 아니라 절대 권력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며,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헌법적 가치로 선언하여 복지국가를 지향하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그 옛날 왕도(王道)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나라 사회복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고 지금도 계속 변화의 중심에 있다.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사회복지서비스의 공급총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복지서비스공급자가 개인사업자를 비롯한 민간의 영리 형태로 유형이 다양해지면서 복지서비스의 유형도 동시에 다양화 되었다. 그러나 사회복지가 양적으로 성장한 반면, 사회복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수십 년 전 그대로 머물러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롯이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중되다보니 개인의 이익이 최우선 가치가 되고, 사회복지는 자신의 삶과 무관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복지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이기주의의 확산은 사회복지를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비용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사회복지의 정당성마저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복지대상자는 사회적 약자로 낙인찍어 시혜와 관리의 대상으로 인식하는가 하면, 내가 낸 세금으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왜 도와야 하는지, 사회복지가 왜 필요한지 어떠한 윤리적 성찰도 없이 사회복지는 그저 계산적 언어로 선진국가가 가져야 할 필요조건 정도로 생각한다. 사람들이 무관심한 틈을 타서 정치인들의 위선과 기만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현장에서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공무원이나 사회복지사들은 자신들만의 리그에 빠져 자화자찬하며 패도(霸道)적 복지를 이어간다. 이 또한 나는 두렵다.


우리 앞에 놓인 사회복지의 상황이 위기 국면이라 판단한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세상은 태평성대다. 하물며 정치인이나 공무원, 사회복지사, 심지어 학자들까지도 이 모든 것이 잘 유지되어 왔으며, 외려 앞으로 더 많은 발전과 성장이 있으리라 떠벌려댄다. 설혹 입으로는 위기라 떠들더라도 실제로는 오늘의 풍요를 만끽하느라 정신이 없다. 정치도, 종교도, 학문도, 그 누구도 이 두려움의 정체를 밝히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맹자는 달랐다. 혼란한 세상에서 두려움에 떨며 절실한 심정으로 대안을 내세웠다. 거기에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가치로 삼을 만한 빛나는 사유가 있다. 맹자의 사상은 오늘날 사회복지 현실에 대한 중요한 비판적 성찰의 기준을 제공한다. 맹자는 인간을 선천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측은지심을 느끼는 존재로 보았고, 인의예지를 통해 정치와 사회가 반드시 전제해야 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네 가지 실마리(四端)를 제안했다. 맹자의 왕도정치는 이상적인 통치모델이 아니라, 이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 조건이었던 것이다.



※ 이 글의 일부 내용은 "이권우 지음, 《최소한의 윤리》, 2025, 어크로스"에서 인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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