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조직 안에 아비투스의 대립
인국공 사태의 진실
2020년 6월, 일명 ‘인국공 사태’로 더 잘 알려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을 두고 한동안 소란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 언론에서 ‘인국공 사태’라고 말하길래 우리나라에 북한 공산당이라도 쳐들어 와서 테러사건이라도 터진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국공’은 인천국제공항을 의미하는 말이었고 내용인즉 이러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보안검색요원에 대한 정규직 전환발표를 하자 이에 정규직 노조가 반발하면서 노사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때마침 정치권과 언론이 불공정과 역차별이라는 프레임으로 정치 쟁점화 시키면서 20대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청와대 국민청원에 30만 명이 넘게 동참하면서 ‘현실판 미생사건’으로 비화된 사건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같은 직원들끼리 야박하게 왜 저러나’ 싶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 일 같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사회복지바닥에서도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평소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상사와 부하직원, 또 어쩌면 공무원과 사회복지사 간의 계급갈등은 심심찮게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국공 사태에 대해 정확한 내막을 알고 싶어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나도 몰랐던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인국공 사태’가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절차의 공정성이 부각된 것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밑바닥에 불편한 진실이 깔려 있었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인·국·공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인국공 사태’의 숨겨진 진짜 이유는 정규직 전환 인원이 1940명으로 기존 정규직 노조원(1361명)보다 많다는 사실에 숨어 있다. 전환 대상이 보안검색요원(1750명) 등 단일 직종에 집중된 것도 그렇다. 정규직으로 바뀐 이들이 별도 노조로 똘똘 뭉치면 인국공의 대표 노조가 된다. 현행 노동법은 복수노조에선 노조원이 한 명이라도 많은 제1노조에 교섭 대표권을 부여한다. 그렇게 되면 정규직이 된 보안검색요원 노조가 기존 사무직의 임금협상까지 좌우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이런 위기감에 사무직 중심의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결사반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인국공 사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두고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 방어를 위한 노-노(勞勞)갈등이 핵심이다.(*)
나는 원래 이 글을 인국공 사태가 벌어진 2년 전부터 쓸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메모장에 제목만 적어두고 지금까지 묵혀두고만 있었다. 그 동안 내가 사회복지바닥에서 일을 하지 않아서 무관심했던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실 나의 짧은 지식을 가지고서는 섣불리 펜을 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국공 사태를 분석하고 통찰하는 글들은 사방에 널렸는데 정작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회복지 조직 내 갈등을 같은 관점에서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우연히 책을 읽다가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난생처음 들어 본 생경한 말이었지만 조금씩 그 개념을 이해하면서 이제는 오래 전 미완성의 글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회적 구별짓기의 기제, 아비투스
‘아비투스’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가 처음 도입한 개념이다. 아비투스(habitus)는 그리스어 habere(소유하다, 영어 have의 어원)에서 유래된 말로, 인간이 태어나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속한 계층(계급)의 다양한 성향과 사고, 가치체계, 행위양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소유하게 되는 개인의 습관이나 성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같은 고향, 같은 학교 출신, 심지어 직업도 같은 친구가 어느 날 복권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됐다고 생각해보자. 그 친구는 값비싼 차를 타고, 웅장한 전원주택에 명품 옷만 입고 다닌다. 하지만 예전에 듣던 음악 취향이나 말투, 행동거지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그 친구는 갑자기 부자가 됐지만 달라진 조건에 상응하는 개인의 성향(아비투스)은 아직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친구의 성향이 바뀌었다면 ‘과거의 내 친구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상황에서 대대로 부(富)를 물려받은 재벌가(家)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내 친구를 같은 계급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이는 경제적 지위와 아비투스가 불일치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렇듯 아비투스는 단순히 개인의 습관이나 취향만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구별 짓고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 태도, 몸짓, 행동 등을 보고 그 사람의 계급적 귀속성을 파악할 수 있듯이 아비투스의 사회적 기능은 사회적 구별 짓기의 기제이기도 하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한 이유가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이 가진 아비투스가 비정규직의 그것과 충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처음부터 정규직으로 채용된 사람들의 성향(아비투스)은 그들 자신의 삶의 과정과 노력, 채용과정 등이 더 우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보편적인 것으로 강요한다. 이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부르디외는 지배계급의 이러한 행위(성향)를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이라고 말한다. 상징폭력은 지배 계급이 그들의 아비투스에 도달하지 못한 집단이나 개인을 배제하고 차별하여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또 조직 내에서 주류(主流)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지배 계급의 아비투스를 따라야 한다는 강박과 자기 검열이라는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형태로 상징폭력이 행해진다.
우리사회에서 계급 간, 집단 간 아비투스의 차이로 인한 갈등과 혐오(또는 그로인한 상징폭력)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 격차에 따른 계층 간의 갈등, 문화적 격차에 따른 세대 간의 갈등, 사회적 역할문제로 인한 남녀 간의 갈등 ....... 동일한 아비투스를 가진 개인들은 곧 끼리끼리의 집단을 형성해 서로 결집하고 (―우리 사회가 참 잘하는 것 중에 하나다―) 고급한 것과 저급한 것, 가치 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 고상한 것과 천박한 것,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등으로 가치의 위계화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아비투스를 산출하고 재생산한다. 그 안에서 개인들은 경쟁과 갈등, 타협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각축하며, 그 결과로 서열화된 질서를 성립한다.
어려운 말처럼 보이지만 다시 곱씹어보면, 아비투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내 안에 축적되어 나와 타인을 구분 짓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산다. 어쩌면 누군가는 자신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아주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겠다. (그러한 주장이 계속되면 꼰대가 되는 지름길이다.) 아비투스는 특정 상황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나타나며, 행위의 주체(자신)에게는 아주 객관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비투스는 같은 계급 내에 속한 사람들에게 무의식적 차원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상호 재해석이 필요 없다. 그리고 동일 계급 내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며 그것에서 벗어난 예외자는 해당 계급에서 배제된다.
사회복지 대나무 숲에 무슨 일이
사회복지 조직 내에서도 인국공 사태와 같은 계급 간 갈등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나는 새로운 글쓰기 소재(?)를 찾기 위해 ‘사회복지 대나무 숲’이라는 페이스북 익명페이지를 가끔 보게 되는데,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글들이 일주일에도 수십 건씩 쏟아지고 있다. 이미 올라온 글만해도 수천 건이 넘는다. 내용만 보면, 사회복지 ‘대나무 숲 사태’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사람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전래동화 속에 나오는 대나무 숲을 인터넷에 가상으로 만들어 하소연을 할까 싶다. 상황이 이런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가는 세상이 신기할 따름이다. (#사회복지사가 정말 착한 사람이긴 한가보다, #그나마 숨구멍이라도 뚫어주신 대숲 운영자님께 감사의 마음이라도 전해야 하나)
(사회복지 대나무숲은)사회복지 현장에서 부당하고, 잘못된 상황을 접해도 어디에다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이 누구나 편하게 떠들 수 있는 열린 공간에 불과하다. (중략) 다만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현실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체계가 전무한 상황이다 보니 사회복지사협회나 사회복지 노조 등에 많은 역할을 기대하고 응원하며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 대나무숲의 기록을 보면서 변화를 위한 의지나 행동에 앞장 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다. ― ‘사회복지 대나무숲’ 운영자의 인터뷰 내용 중
대나무숲 운영자의 인터뷰 내용이 인상적이다. 그저 ‘대나무 숲’에 불과하다는 운영자의 말처럼 정말 중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운영자의 바람대로 ‘변화를 위한 의지나 행동’은 아직 묘연한 것 같다. (다소 먼 길을 돌아 온 느낌이지만) 나는 사회복지 조직 안에서 이른바 '대나무 숲과 같은 현상(문제만 있고, 해결방안은 없는)'이 계속되는 이유를 의지와 행동의 부재로 보지 않는다. (―사실 나도 오랫동안 사회복지사의 의지와 실천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게 아무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서 같은 문제의 원인을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의 계급적 성향체계인 아비투스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복지 대나무숲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대체로 사회복지 조직 내에서 피지배 계급의 사람들이 지배 계급의 위선이나 갈등 문제를 하소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적극적으로 댓글로 위로를 전하거나 훈계하는 사람, 약간 소심하게 공감의 표현으로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 그리고 나처럼 완전 소심하게 공감만 하고 침묵하는 사람, (아니면 자신과 관련된 내용이 있을까싶어 몰래 훔쳐보는 사람) ....... 이유야 어찌됐든 이 가상의 공간에서 사회복지 조직 안에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서로의 아비투스를 통해 극명하게 구분되고 또 구분 짓는다.
아비투스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습득되고 자신의 행위와 타자의 행위를 판단하는 준거가 된다. 같은 ‘을(乙)’에 입장에 있으면서도 나와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훈계하기도 하고, 문제적 상황을 보고도 공감하지 못하거나, 또는 공감하더라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유는 아비투스의 지시적 메커니즘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관행들, 상대방을 바라보는 법, 앉는 법, 서 있는 법, 침묵하는 법, 말하는 법(비난하는 표정과 어조, 비판하는 분위기 등)”이 강력한 지시적 메시지로 작용하기 때문에 개인은 아비투스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보았다. 따라서 '대나무 숲'에 올라오는 글들을 사회복지 조직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보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회복지 조직 안에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볼 때는 아비투스의 계급적 차이에서 발생한 체계적인 오인(systematic misrecognition)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계급의 차이에서 오는 조직문화의 질서를 개인적 관심과 재능의 문제로 오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인의 결과로 계급 구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문제는 있지만 해결책은 없이 계급의 재생산과 정당성을 인정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사회복지가 고인물이 된 배경
한국 사회에서 작금의 '공정' 논란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 단일팀 논란과 조국 전 장관 자녀의 입시 문제에서도 '공정'은 뜨거운 화두였다. 시계를 더 뒤로 돌려보면 2000년대 초 시작된 KTX 승무원의 정규직화 투쟁을 둘러싸고도 비슷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렇듯 '공정'을 둘러싼 사회적 이슈는 거듭 반복되는데 왜 우리는 비슷한 사태가 터질 때마다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을까(**) 그건 사태의 원인을 시스템의 문제로만 보기 때문이다. 불공정한 입시 문제는 입시 제도가 문제이고, 불공정한 정규직 전환의 문제는 채용절차가 문제라는 식이다. 잘 알다시피 시스템은 바뀌어도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불공정은 사람이 한 짓이지 시스템이 한 게 아닌데 애꿎은 시스템 탓만 하고 앉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사회복지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물론 시스템적인 부분에서만 그렇다. 사회복지 시스템의 발전으로 지금은 어느 정도 먹고살만할 정도로 최소한의 복지수준은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거기서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하고 점점 고인물이 돼가고 있는 느낌은 나만의 과민반응일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복지 시스템은 정말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국민들이 체감하는 복지인식과 수준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매번 변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시스템 변화만 시도했지 일선 공무원과 현장에 사회복지사, 그 중에서도 특히 특권을 가진 사회복지 지배 계급의 사람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대로다. 공무원은 그나마 정권이 바뀌거나 시스템이 바뀔 때마다 자리이동이라도 하는데 (―그게 너무 심한게 오히려 문제지만―), 그에 반해 사회복지 현장의 특권 계급의 사회복지사들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그 사람이다.
혹자는 ‘사람도 시스템의 일부이고 시스템이 변하면 사람도 따라 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영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시스템처럼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 오랫동안 쌓아 온 삶의 궤적(가정환경이나 출신, 사회적 상승과 쇠락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다른 삶의 궤적을 통해 쌓인 아비투스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같은 실존적 상황에서 같은 문제에 대해 개인(또는 계급) 간에 명백한 입장 차이를 낳고, 이러한 입장 차이에서 개인은 먼저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나서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 모여 집단을 형성하고, 결과적으로 우위를 선점한 집단은 자신들의 집단을 위협하는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게 되면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변화를 방해한다. 세상 사는게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고 뭐라 할 수는 있겠지만,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보고도 상급자니까 그럴 수 있고, 하급자니까 마땅히 해야한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계급구조를 정당화하니까 문제가 개선될 리가 없다.
아비투스를 알아야 하는 이유
지금까지 사회복지 지배 계급들은 사회복지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문제의 원인과 해결과정에서 자기 자신들은 쏙 빼놓고 사회복지 조직 전체를 싸잡아서 시스템의 혁신과 (지배 계급이 아닌)사회복지사의 처우개선을 운운해왔다. 그 결과 본질은 흐려지고, 지배 계급의 지위는 유지되고 잇속만 챙겨준 꼴이 됐다. 그리고 그 반대 입장에 있는 피지배 계급의 사람들은 계급 간의 차이를 정당화하고 현실을 오인한 결과, 특권적 지배 계급이 가진 (자기기만과 위선 같은)도덕적 태도는 아무도 문제 삼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지금까지도 문제는 문제로서만 존재하고 여전히 갈등과 반목(反目)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비투스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아비투스는 개인의 행위를 이해하는 해석 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스템(제도, 정책)이 아니다. 시스템의 진보를 가로막는 사람이다. 궁금하면 ‘사회복지 대나무 숲’에 한 번 가보시라.
취향(아비투스)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 다양한 분류법에 의해 구분되는 사회적 주체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탁월한 것과 천박한 것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의 탁월함을 드러내며, 이 과정에서 각 주체가 객관적 분류 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표현되고 드러난다.
― 부르디외,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中
... 알쓸복잡.
※ 이 글은 이하준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중 「구별하는 사회」의 일부 내용을 발췌요약 정리했습니다.
※ 참고문헌
(*) "'인국공 사태' 끝난 게 아니다", 한경오피니언, 2020.07.09. 00:25, https://www.hankyung.com/opinion/article/2020070875411
(**) “인국공' 사태와 우리 시대의 정의론”, 프레시안, 2020-07-09 03:54:17,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020070815585817383#0DK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