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아 오늘로 점자도서관에서 주관한 7회기 독서토론이 끝났어.
2주에 한 번씩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마지막이 올지 몰랐네.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 백정연 작가가 썼어.
유유 출판사에서 나왔네.
척수장애가 있는 남자와 부부가 되어 사회복지사 실무사 너머 가족으로서 가지는 생각, 겪게 되는 보람과 울분 묻은 에피소드를 가지런히 담았어.
“남편은 도움벨을 싫어한다. 도움벨을 누르는 것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데, 왜 장애인은 이렇게 매번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한다. 그래서 회사 옆 은행에 갈 때도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정문이 아니라 빙 돌아가야 하는 후문을 선택한다. 정문으로는 도움과 도움벨 없이 진입할 수 없는데 후문으로는 혼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문의 도움벨을 누르면 우선 그 요란한 소리에 주변 행인들의 시선이 모두 주목되고, “고객님,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며 휠체어를 미는 직원의 모습에 또 한 번 시선이 꽂힌다.”
도움벨이 필요 없는 사회를 꿈꾸는 저자의 외침.
‘도움벨’로 한정되는 관계.
도움을 주는 이와 받는 이의 세계가 다를 수밖에 없는 구조.
‘취약계층’, ‘소외계층’도 마찬가지 같다는 생각을 언젠가 했더랬어라.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 소식이 보도될 때 혹은 동절기 국회위원들의 웃지 못할 연탄 투혼을 선전할 때 세트처럼 등장하는 말이잖아.
주는 자의 선의가 빛나기 위해 받는 자의 무능이 만천하에 부각되어야 하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냐마는.
누군가는 ‘도움벨’이 있어도 불평이냐고, 도대체 끝이 없다고 선을 그을지도 모를 일이지.
“언젠가 걸을 수 없던 사람이 로봇을 입고 걷게 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하반신 마비 20년 만의 기적”이라는 뉴스에서 웨어러블 보행 로봇을 입고 걷게 된 당사자가 나왔는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가 감격스러워했다. 나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남편이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 영상을 보며 내가 당사자의 마음과 바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감정이 들기도 했는데 그 후 친한 척수장애인들과 술을 마시면서 웨어러블 로봇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 “실변이나 급똥으로 빨리 화장실에 가야 되면 로봇을 어떻게 벗지”라고 하며, 절대 안 입는다고 진심을 담은 농담을 했다.”
그러게.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것이 있어요.
찬반 논제 중에 위에 상황을 들며 장애 당사자인 우리의 의견을 묻는 질문이 있었어.
누나?
극단적 현실주의자로서 헛된 꿈은 안 꾼다고 답했지.
양안이 의안인데 의학이 발달하기를 기다린다거나 유주 얼굴을 보고 싶다거나 뭐 이런 바람 같은 것.
오오오, 감상적이어라.
덤덤하게 도려낸 지 오래이기도 하거니와 나는 지금 여기에서 유주 웃음소리 듣는 것이 더 행복하단 마리오.
너나 나나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가지지 못한 것에 연연한 시간 이미 오버 타임이라서.
살짝 억울한 감이 없지 않지만 고장 난 몸들이 조금 더 편하게 화장실 갈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음 둥.
아 이 말투 뭐냐고?
그러니까 드라마 『토지』의 배경이 간도가 되었단 말이시.
60회를 달리는 중인데, 거기 송해도 응칠이도 이런 말투를 써요.
월선 아지메가 자꾸 속이 안 좋다며 체기가 있다 하는데, 혹시 홍이 동생이라도?
거북이는 기어이 김두수라는 밀정 놈이 됐고, 강포수는 죽고, 귀녀가 낳은 두메는 공노인 손에 맡겨지고, 봉순이는 울며 떠나고….
아 또 무슨 얘기하다가 내가 여기까지 왔일꼬.
강산이 너는 누나 이러는 거 익숙하잖아.
아, 고장 난 몸들 얘기하고 있었다고?
독서 토론 마치고, 설거지 한 판 했더니 현재 시각 밤 10시 38분.
괜히 허한 속을 감각하며 ‘테라’라고 점자가 찍힌 친절한 캔을 만지작거리게 되나니.
도대체 ‘콜라’도 ‘사이다’도 그저 ‘탄산’이라 써 있으면 이 맹인 어떤 캔을 따야 한단 마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