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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트밀니트 May 20. 2024

남편의 대학원 가족 모임

주치의의 권유에 따라 발병 후부터 사람들을 만나는 걸 조심해 왔다. 덩달아 모임이 많던 남편도 참여 횟수가 현저히 줄게 되었다(보통은 가족 모임이 많으니까). 그렇게 1년 반이 지나고 어느 날, 남편이 점점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 가족 모임은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정말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는 거라 기대 반, 약간의 두려움 반을 가지고 갔다. 처음 가보는 캠핑장에, 모인 사람 중에는 외국인도 있다. 고난이도다. 아이 3명, 어른 5명 총 8명이다. 낯선 환경에, 오고 가는 낯선 언어들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겠더란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눈치는 보는데 눈치는 없는 그런 상황이 계속됐다. 캠핑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남편 지인의 와이프가 해달라는 걸 해줬다. 말귀도 잘 못 알아듣고, 눈치도 없고. 한없이 작아졌다. 그래도 겉으로는 계속 웃으려고 노력했다. 와중, 남편의 지인이 말이 없는 나에게 농담 삼아 말을 건넸다.


남편 지인 : 형수님, 이제 일하셔야죠~ㅋㅋ

나 : 글쎄요 ^^; 아직은...

남편 지인 : 형님이 많이 힘들어하던데~ㅎㅎ

(남편과 내가 빵 터진 듯 웃었다.)

남편 지인 : 박사도 하셔야죠, 형님 말로는 학구열이 대단하시다고 하던데.

나 : 아니에요~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남편 : OO(남편지인)랑 와이프랑 성향이 비슷해서 한 가지 파고드는 걸 잘하더라고

남편 지인 : 지금 둘러서 일하러 가라고 얘기하는 거 같은데~ㅋㅋ


그냥 가볍게 넘기려면 넘길 수도 있는 상황이다. 당시엔 기분 나쁜 줄도 몰랐다. 그 순간엔 그저 이 상황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 크게 악의는 없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무엇보다 거기 있는 상황 자체가 벅찼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내게 관심을 주는 게 나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자세한 내 상황을 모르니까, 평소 남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나름대로 남편을 생각해서 한 말일테니까. 그래도 그 대화의 끝은 씁쓸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게 잘못된 선택이었나? 지금이라도 다른 직장을 구해야 하나?’ 점점 입맛이 없어져 고기를 구워도 먹기가 싫어졌다. 아이들을 핑계로 그 자리를 나와 몇 시간 동안 밥도 안 먹고 아이들 노는 데서 케어했다. 그 시간 동안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중에 아이도 처음엔 또래들과 잘 섞이지 못해 겉돌았다. 남편 지인 아들은 아이랑 동갑인데도 영어 유치원을 다니고 있어서 영어도 섞어 쓴다. 남편도 이런 모임이 오랜만이라 어색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남편도, 아이도 조금씩 편안해졌다. 무엇보다 아이가 너무 좋아했다. 아, 이것도 계속 부딪히고 겪어봐야 하는 거구나. 아이 때문에라도 이런 모임에 자꾸 참여해야겠다고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남편도 내 말을 듣고 반가워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지금까지 계속 기분이 좋지 않다. 그 안에서 한없이 초라해졌던 나 자신이 계속 떠올랐다. 그동안 마음 비우는 노력을 정말 많이 해와서 이제 좀 편안해졌다고 느끼던 찰나였는데, 다시 불안해졌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구나. 뭐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내가 하는 이 일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무례하다면 무례했던 그 말을 듣고도 제대로 대응 못한 것에도 스스로가 답답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너스레를 떨고 웃으며 한마디 했을 것이다.) 남편에게 이야기해 보았지만 농담으로 한 말에 뭘 그러냐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받으면 사회생활은 어찌하냐고 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유난스러운 것일까? 남편 성격 상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차례 무기력과 불안으로 힘들었던 나로서는 흘릴 수가 없는 이야기다. 그 모임에 나간 것 자체가 무리였던 걸까, 그 사람이 무례했을 뿐이었을까, 내가 소심하고 예민한 걸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엉킨 월요일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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