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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Oct 14. 2024

불성실한 생활일기

최초의 반항

그것이 나의 첫 반항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드디어 청소년의 시기에 진입하게 된 내게 부모님은 시계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만 해도 국민학생이 시계를 가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4남매나 되는, 특히 딸 셋에 아들 하나인 형제 가운데 셋째딸이었던 내가 시계를 갖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자 선물로 시계를 사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어떤 시계일까? 우리 반에서 제일 부잣집 딸내미인 M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미키마우스 시계일까? 아니면 똑똑하고 잘생긴 반장 K의 것처럼 전자시계일까? 비누방울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팡 터지는 상상의 밤이 지나갔다. 며칠 후 엄마가 내민 시계, 그 시계는 새것이 분명한 가죽으로 된 줄과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미묘한 사용감이 있는 데다가, 제대로 손목시계를 구경해 본 적이 많지 않은 내 눈에도 시계와 시계줄의 조합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시계를 받아들고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나는 진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계신 안방 문을 열어젖히고 울면서 시계를 집어던졌다. “이거 가게 손님이 맡긴 거지? 어떻게 이런 걸 줄 수가 있어?”  

   

부모님은 당시 스탠드빠라고 불리는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스탠드빠의 손님들은 간혹 술값이 부족하면 금붙이나 시계 따위를 맡기고 가던 시절이다. 며칠이 지나 돈을 들고 맡긴 물건을 찾으러 오기도 하지만 영영 돌아오지 않는 손님도 많았다. 엄마는 그렇게 남겨진 시계 중 하나를 골라 시계 줄만 중학생에게 어울릴법한 가죽 줄로 바꾸고 내게 준 것이다. 형제 많은 집의 셋째 딸로 자라며 나는 조용하고, 착하게, 없는 듯이 사는 법을 터득해 왔다. 옷이건 신발이건 언니들에게 물려받는 것이 당연했고, 하나뿐인 남동생은 늘 새 물건을 갖는 것도 그러려니 했다. 무언가를 욕심내거나 다투기보다 대충 양보하고, 주어지는 대로 받는 데 더 익숙했다.     

그런데 그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과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의 분노가 나를 압도했다. 평소에 그렇게 무서워하던 엄한 아빠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것은 부당하다’는 감정이 나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날의 반항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내가 세상과 만나는 태도를 변화시켰다. 거기에 더해 부당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최초의 경험이기도 했다. 결국 엄마는 새 시계를, 이번에는 정말 새 것으로 사주겠다고 약속하며 내가 내던진 시계를 챙겼다. “시계는 좋은 건데...” 내가 기억하는 그날 엄마의 마지막 말이었다.


*오래 전에 썼던 글을 요즘 참여중인 글쓰기 수업에 발표하기 위해 조금 수정했다. 선생님과 다른 참가자들의 의견을 들으며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의미가 타인에 의해 읽혀지는 경험이 꽤나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비평듣는 것을 싫어하는 나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은 문단 나눔 외에는 따로 수정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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