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일지
'오브젝트 모듈 object module'이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건 2018년 경. 내 정체성과 추구하는 방향이 담긴 단어의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적 오브제와 재활용 가능한 모듈의 성격이 결합된 유기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다는 갈망을 담았다. 로고를 만들어 상표권을 등록하고 법인을 설립하고 몇몇 디자인 구상을 인증 등록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디벨롭하고 웹어드레스를 구매하고 또 회사 이메일을 파고 시제품을 만들고 SNS계정을 운영하고 판매 채널을 개발하고. 전 과정을 동생과 둘이 느리지만 차곡차곡 수행해갔다. 그렇게 1년 여가 지났을 때, 이전 직장으로부터 일손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오브젝트 모듈은 방치되었다.
4년 반 정도 두 개 회사에서 시스템 컨설턴시, 테크놀로지 어드바이저리 직무로 여러 대기업에 ERP 운영/개발/구축, IT 전략 수립, IT 실사 평가 등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 사이에 Enterprise Architecture 및 IT Service Management, Project Management 관련한 자격증들을 취득하면서 이론적 뒷받침도 해두고 말이다. 원체 첫 직무를 ERP Financial module로 시작했던 데에다 대학원에서 주구장창 듣던 SCM에 더해 이런 저런 스타트업에서 경험한 제품개발 및 Sales 시스템 설계 경험이 더해지니 Logistics는 어렵지 않게 만질 수 있었다. 꽤 versatile한 커버리지를 가진 기업 IT 스페셜리스트가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꽤 많은 변화가 닥쳤다.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회사 생활-명예로운 지위와 보장된 연봉-에 의미 두지 말자는 각성이 되어. 일단 경제적 자유를 보장할 자산 포트폴리오와 현금 흐름을 안정화하는 데에 모든 걸 포커싱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학습비용으로 적지 않은 손해를 보면서 현실감각도 얻고 말이다. 심리적, 환경적 변화와 함께 쏟아지는 문제들을 준비되지 않은 채 견디기 어려운 속도로 해결해야 했다. 반은 도망치듯 그저 시간이 어서 흐르기만 바라면서 견뎌냈다. 이제는 이래저래 자리잡히고 다시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한동안 모든 게 무의미하고 재미없어서 소비로 허기를 채웠는데 문제들을 얼추 정리하고 나니까 또 이런 저런 상념이 많아진다.
2025년 초에 화실을 나갈 적 마음은, 앞으로 예술을 매개로 포트폴리오를 쌓았으면 좋겠는데 오래 생각을 쉬어서 자기 세계에 몰입이 안 되는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정도의 바람이었다. 직장 생활은 나의 주제를 탐구할 계제가 참 없다. 클라이언트의 상황을 정성적으로 들여다보고 정량적으로 분석해 리서치와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솔루션을 제시하는 작업은, 이미 발생한 상태를 정련하고 데이터화하는 작업이 핵심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사회에서 돈을 받고 하는 일에 모든 가치 판단은 수익성으로 귀결되므로 딱히 철학이랄 게 요구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작업이고 학습력과 논리적 사고, 판단력을 키우는 데에 도움되지만 자기 세계를 파고들 기회는 적다. 하다보면 허무해지기 십상이다. 무튼 오랜 기간동안 손놓고 있었더니 사유를 디벨롭하는 습성이 메말라버려서 나름 애먹던 터였다. 학교에 진학해서 세계관을 디벨롭할까 고민했다.
그냥저냥 9개월동안 80% 정도는 입시를 염두에 두고 포트폴리오 작업 및 입시 미술 시험 문제를 풀어봤다. 어린 학생들의 문제 접근도 옆에서 보다보니 예전에 온마음으로 그림 그리던 감성을 되짚게 되기도 하고. 20년 간의 경험과 사유가 축적되어서 난 어떤 사람이 되었나, 그 때와 지금에 할 수 있는 작업의 차이는 무엇이고 또 지금까지 구축해 온 ‘내 것’이 무엇이던가 자기 관찰이 되었다. 참 좋았다.
다만, 결국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렀고. 예술 교육의 특성 상 표준 사고 교육처럼 토론과 크리틱을 통해 디벨롭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세인트마틴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다소 책임없는-목적없는, 정해진 방향성이 없으니까 비평의 의미도 퇴색되기 쉬운- 크리틱을 위한 크리틱만 난무하는 인상이 들어 그만 두었다. 아, 이제 그냥 다시 내 작업에 몰입하면 되겠다 싶었다.
뭐가 하고 싶었나 하면. 대학원 때 연구주제로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개발 환경으로서의 오픈 프로젝트’를 다뤘는데 그 후에 그걸 비지니스 모델로 디벨롭하려 애쓰면서 이건 산업이라기보단 예술의 영역이란 생각을 많이 했었다.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지만 어떤 인사이트를 발견하는 데에 유의미한 가치가 있는, 다소 유토피아적 관점이 많이 녹아드는 주제였다. 완성한다면 블럭체인같은 혁신적 철학을 제시할만한 주제 말이다. 왜 그 많은 오픈 프로잭트가 그 큰 리소스를 들이고도 지속되지 못 하는지 핵심적 요소를 짚어내고 싶은데, 그건 예술의 영역이라고 말이다.
늘 되돌이표처럼 수렴되는 주제는 ‘창의성’인데. 나의 창의성 정의는 ‘인풋 정보가 많을수록 아웃풋의 베리에이션이 다양해지고, 그 수가 많을수록 유의미성이 높아진다’는 전제가 있다. 오픈 프로잭트의 목적도 참여자 수를 늘려 인풋, 아웃풋을 최대화하겠다는 건데 현실에서 그 효율이 확보되는 경우는 0에 가깝다. 즉 인간의 활동은 규제와 목적의 제약조건이 없으면 결국 아노미 상태가 되어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데 ai 속도는 효율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에 도달 가능하다. 알고리즘에 따라 창의적인-유의미한 베리에이션이 발생할 확률만 확보하면 된다.
이 알고리즘은 다시 표준의 문제와 맞닿는다. 어떻게 순수한 변형을 창조할 수 있을까. 현재의 ai는 기존 화가들의 작법을 픽셀화해서 벡터데이터로 치환, 규칙성을 복제하는 방식으로 예술적 창작을 시도하는데 그건 그냥 데이터와 확률에 의존한 표준의 변형에 그친다. 인간의 비주얼 창작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 이 부분을 작업해 보고 싶었다. 이런 걸 예술이라고 부르든 말든 상관없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나오는 아웃풋은 모두 예술적 기준에서 미적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뭐 일단은 그런 포부로 과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우선은 정리되지 않은 인사이트를 기초삼고자 어지러이 기록해본다. 그간 고민했던 수많은 개념들이 질서없이 흩뿌려졌다. 이들 간의 관계를 정립하고 생산성을 획득하는 시점을 고대하며, 그래서 당장 내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 무언지 치열하게 생각할 거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나중에 확인하게 될 걸 상상하면 꽤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