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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정원 Jan 07. 2021

해삼내장젓을 얹은 흰살생선회,
그리고 하이볼

Ep. 4 31,046(-48,954 )

다진 새우살로 소를 꽉 채어 튀긴 표고버섯에 슴슴한 쯔유를 그득 끼얹고 소복이 실파를 올린 요리라든가, 니쿠미소를 잘 발라 부드럽게 익힌 가지라든가, 해삼내장젓을 얹은 흰살생선회. 받고, 하이볼. 게임 끝. 

간만에 만난지라 식사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화제는 자연스레 나의 이번 생으로 옮겨갔다.  A는 특유의 건조한 말투로 아직(은) 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잉, 이렇게 맛있는 밥과 술로 배를 불려 놓으시면 저는 뭐라 말씀하셔도 냉큼 수긍하지요.) 사실 그건 설득이라기 보다는 냉철한 분석이었다. 이런저런 수치와 사실들을 감안했을 때 아직(은) 망하지 않았어. 


이어 우리는 시그널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보내는 신호. A는 말했다. 꾸준히 세상에 자신의 시그널을 보내다 보면 결국 꼭 봐야할 사람이 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나의 신호를 감지한 그 사람이 새로운 기회를 줄 것이며, 기회는 단 한 번이면 족하다. 한 번의 기회가 다른 기회를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만나는 접촉면을 넓힐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시그널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는 물론 대단히 두려운 일이고 피드백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피드백은 그저 기분이 더러울 뿐이지만, 좋은 일은 대단히 구체적인 기회로 다가오더라. 그러니 너의 점들을 연결시켜 스토리를 만들어 봐라. 너의 스토리는 사람들이 호기심을 느끼고 관심을 가질만 한데, 그것은 엄청난 자산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골자를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단언했다. 


“너 진짜 이상해.” 


심지어 동석한 지인 B에게 동조를 구했다.  


“얘 진짜 이상하지 않냐?”


…아니, 나는 늘 나였어서 그다지 이상함을 못 느꼈는데, 게다가 나보다 이상한 애들 진짜 많이 봤는데…라고 생각했지만, A가 하도 확신에 차 있길래 침묵을 지켰다. 더군다나 내가 아는 A는


1. 감상적이지 않다. 

2. 냉철하고 분석적이다.

3. 오구오구 해주는 스타일이 아니다.

4. 빈말을 하지 않는다.

5. 허튼 소리를 참지 못한다. 


1-5까지를 고려해 보면, 그리고 A가 마련해 준, 회상만 해도 침이 흐르는 그날의 환상적인 식사까지 고려해보면 내가 진짜 이상한 게 맞는 것 같다. 맞을 것이다. 맞다.

은유는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삶에 기반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청춘이라 어떻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나의 청춘은 어떠했다는, 있는 그대로의 해석 작업이다.’.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강요하는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 비록 그것이 모나고 볼썽사나울지라도 - 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문제라면 이상한 편이 좋다. 이상할 수록 좋다. 해석거리가 가득하다는 뜻이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말 귀한 경험들이 인생에 몇 있다. 책을 쓸 만한 이야기거리는 어떻게든 될 것 같다. 


하지만 은유는 또 말했지.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쥐며느리와 며느리의 차이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진주고, 이야기거리가 있어도 써야 글이다. 그래서 예전 기억 하나를 발굴해냈다. 오오오래 전 빈 대학에서 독일어 집중 코스를 들었다. 하루는 2인 1조로 팀을 짜 작문 활동을 했다. 주어진 서른 여 개의 단어를 활용하여 글 한 편을 써야 했다. 운이 좋게도 나와 합이 잘 맞던 슬로베니아 친구와 한 팀이 되었다.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몇 차례 굴려 이리지리 짜맞혀 본 후, 웃으며 팀메이트에게 조금 황당한, 하지만 서른 개의 단어들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느새 교수님이 조용히 옆에 다가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교수님은 예순을 좀 넘은 나이에 집근처 잘 가꿔진 묘지에서 아침 산책을 즐기는 ‘빈’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끝냈을 때, 그는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반달 안경 너머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그러나 또렷이 말했다. 독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 중에서도 너 같이 독어를 쓸 수 있는 이는 몇 없을 것이다라고. 


독어가 차지하는 내 머릿속 공간이 좁쌀 한 톨보다도 작아진 지금은 그때 내가 잘 못 들은 것이 아닐까 묻기도 한다. 하지만 독어력 최고이던 당시의 나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이 둘 사이의 타협점을 찾자면, 그 때 그 교수님은 언어에 대한 감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독어 실력이 아니라 언어를 다루는 것에 대한 감. 오래전 스쳐 지나간 일화를 들먹이며 잘난체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수년 전 이름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지나가며 한 말을 굳이 기억에서 찾아 내어 매달릴 만큼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감은 있다 치고, 감이 있으면 된다. 기술은 익히면 된다. 운동 신경이 있으면 새 운동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듯, 글쓰는 방법도 배우면 되지. 그래서 요즘 작법책을 매우 많이 읽고 있다. 작법책들이 서로 상충되는 충고를 해대는 바람에 머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그 혼란함 속에서 내가 택한 선택의 조합들이 나의 스타일이 될 것이다. 그 스타일은 점점 구체화되어 가고 있다. 명확한 것은 그간 내가 써온 스타일의 글들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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