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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Mar 15. 2019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정기 간행물 마감을 가열차게 돌리던 나는 출근길에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가 새벽에 돌아가셨어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회사에 부고를 전하며 금일 업무만 마무리하면 내려가겠다고 보고를 했다. 할머니의 연세를 물으셨고, '아흔여덟이요.' 라 말하며 호상이라는 말을 듣게 될 거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호상이라는 인사는 결코 유쾌한 인사가 아님을 그제사 알았다. 아흔여덣에 가시든 200살에 가시든 피붙이를 보내는 마음은 처참한 것이었다. 이제 어떤 상에도 호상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으리라.


이미 한 달 전에 폐가 다 녹아 척추 위에 살갗만 남아 겨우 목숨을 연명하던 할머니였다. 우리 모두는 할머니가 운명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수척했고,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물티슈로 입안을 닦아내야 했고, 코에는 호흡기가, 배에는 식사를 위한 튜브가 달려 있었다. 저 튜브로 음식이 들어가는 게 정말 의미가 있긴 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배가 쑥 들어가 있었고, 앙상해진 할머니의 신체는 공포감마저 자아내는 모습이었다. 황급히 모든 가족들이 할머니를 찾아뵙고 한 달이 지났던 터였다.


 

나는 돈 많은 것도 안 부럽고, 건강한 것도 안 부럽고, 오래 사는 것도 안 부러운데 딱 하나. 딸 있는 냥반들은 부럽더라.



할머니는 살아생전에 8명의 아들을 자식으로 두셨다. 8형제. 8남매 10남매는 간간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8형제의 위업을 뛰어넘는 출산율은 본 적이 없다. 어른들끼리 하시는 말씀에는 아들이 하나 더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사실은 9형제인샘. 최소 8년을 임신 상태로 계셨고 큰 아버지와 막내 삼촌의 나이 차이는 거의 아들뻘이어서, 큰 오빠의 아들은 막내 삼촌의 아들과 10살 차이도 채 나지 않는다.


거대한 가족이었다. 성경에 아담과 이브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았다는 것 같은 그런 이야기가 한집안에 있었다. 아들 8인이 19명의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들이 다시 결혼해서 이제 나는 숫자도 모르는 자식들을 또 낳은 상태였다. 식구가 너무 많으니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급한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 온 일곱째 삼촌이 돌아오자 입관식을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할머니는 이미 수의를 입고 계셨다. 정말 마지막 순간이었다. 손을 잡아주시라고, 얼굴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말에 가족들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지로 얼굴을 감싸고 삼베로 몸을 묶었다. 시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색이 고운 나무 위에 할머니는 그렇게 단단히 묶였다. 


큰아버지와 삼촌들은 입관식에서 장례사가 “곡 하며 절하세요”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열하셨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들었던 입관식에 할머니와 작은할머니가 읖조리듯 내뱉던 ‘아이고'는 구슬픈 민요 같았는데, 8형제와 8명의 며느리, 그리고 그들의 자손이 토해내는 아이고는 너무나도 처참했고,  '아이고 버튼'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장난기 많고 유쾌한 우리 식구들은 손님을 맞이하는 내내 밝은 모습이었지만, 때 되면 나타나 장례사가 ''곡소리 버튼'을 누르면 눈물보를 열었다. 어디에 그 많은 눈물이 숨어있었을까. 이미 미라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있던 할머니건만, 온 가족이 이미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를 상을 매일매일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우린 '아이고 버튼'에 힘없이 아스러졌다.


생각보다 장례식에는 절 할 일이 많았다. 조문 오시는 분들의 인사로 하는 절을 빼고도 때마다 드리는 각종 절차에 수십 번의 절을 했다. 장지에서 큰 오빠가 한 장씩 쥐여주는 만 원짜리를 노자돈이라는 명분으로 봉분을 쌓아 올리는 일꾼에게 줄 때조차 절을 해야 했다. 망자에게 드리는 절은 2번이 기본이지만 절차에 따라 며느리는 4번의 절을 하기도 했다. 망할 경상도.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생전에 제사와 차례에 늘 4번을 무려 큰절로 올리셨다.


병원에서 빌리는 엉성하고 어벙한, 질이 낮은 그 상복은 전투복으로 완벽했다. 수없이 반복하는 절을, 장지에서 흙바닥에서도 20번은 족히 할 절에 최적화된 옷이었다. 질기고 튼튼한 옷, 이미 나온 무릎은 내 옷이 상하면 어쩌나 하는 유치한 고민 따위는 없게 만들어 주는 훌륭함이 있었다.


할머니 사시던 집 뒷산에 묻히기 위해 운구차 뒤를 10여 대의 차들이 뒤따랐다. 까만 차였으면 조폭의 상인 줄 알았으리라. 하루에 버스가 고작 3번 다니는 작은 길가에 조롱조롱 주차를 하고 또 그렇게 몇 시간을 서 있었다. 영정을 든 사촌 동생은 집안을 한 바퀴 돌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극악한 미세먼지도, 격한 추위나 습한 눈보라도 없는 적당한 날씨를 택해주신 할머니께 감사한 날이었다.


포크레인이 파준 땅에 할머니를 모신 관을 내리고 장례사는 또다시 아이고버튼을 눌렀다. 관과 시신 사이도 흙으로 채워졌다. 관 안에 공간 없이 흙으로 매워지는 모습이 나에겐 입관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흙으로 돌아간다는 게 저런 의미였다니.


조문객보다 상주와 가족이 더 많았던 할머니의 장례식장은 조용할 새가 없었고, 할머니 영정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저 간만의 명절 정도의 가족모임이었을 3일이었다. 어린 시절 명절에 제사에 철철이 큰아버지댁에서 같이 잠들고 뒹굴던 우리에겐 익숙한 풍경이었다.


둘째 큰아빠의 셋째 아들인 오빠, 일곱째 삼촌의 큰아들, 할아버지의 동생의 둘째 아들이라 당숙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삼촌이라고 부른다는 수십의 친척들과 인사하느라 혼이 나간 큰고영은 할머니의 입관식에서 아이고 버튼에 덩달아 터진 눈물보에 흑흑 대던 내 어깨를 잡아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

 
그렇게 계속 손을 빨면 닳아 없어진다던 할머니의 협박 덕에 손 빨던 버릇을 고친 넷째 아들의 큰딸, 마흔이 다되도록 할머니의 기억 속에 여전히 우유병을 쥐고 있던 그 손녀딸은 자바라 장을 열면 나오던 흑백 티브이, 할머니가 여물을 쑤던 아궁이. 배추적를 부쳐주시던 주방, 이제는 없어진 누에고치 키우던 방을 큰고영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장례를 마무리했다.


8형제를 낳으시고 아흔여덟의 나이에 돈도, 건강도 다 필요 없다시며 유일한 아쉬움은 딸이 없는 것이었던 할머니는 아들과 자부와 손자 손녀와 손서 손부도 모자라 증손자 십 수 명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셨다.


할머니는 잘 쉬고 계실 거다. 난 오늘도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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