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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빈 Sep 12. 2018

변화의 초입

참 갑갑한 하루였다. 시간에 갇혀버리고 종속되어 없던 정신적 압박을 모자로 꾹 누른 채 나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달려갔다. 마치 지옥 열차에 온 걸 환영이라도 하듯 새빨간 급행버스가 시야에 훅 들어왔다. 집이 외곽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이 버스를 타지 않으면 나는 학교에 늦을 것이었고 그런 불쾌함은 그 날의 기분을 정할정도로 중요한 하나의 의식이었기에 나는 불안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카드를 찍었다.


몇 개월 자르지 않은 머리는 중구난방으로 늘어지며 남들이 보기에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 모습이지만 어느 순간 외양적인 것으로 사람을 두고 싶지도, 평가받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갑자기 매력자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수업 중 교수님은 어느 책에서 발췌한 매력자본을 꽤 멋스럽게 말했다. 이제는 문화자본도 아닌 매력자본의 시대라는 걸. 그것의 대부분은 외양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외재니 내재니 하던 이분법적 사고는 꽤 쓸데없는 힘겨루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재적인 것을 외재적인 글이나 말로 표현 가능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외재적인 예술적 작품이나 기술이 자신의 내재적 욕구로 인해 창출되기도 하니 말이다. 어떤 것이든 시공간의 결박 안에서 연결고리를 가진 성좌들의 모습 같다.

무튼 머리를 5분밖에 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 머리 아니 머리카락이 너무나도 늘어져서 모자를 벗고 통학시간의 햇빛에 맡기기로 하며 풍경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까 놓친 얘기가 있다. 시간에 종속됐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데. 물론 시간은 중요함에 틀림없다. 하지만 광활한 대지를 걸어 다니며 수많은 채집활동을 했던 인류의 DNA에는 똑같은 반복 패턴은 인간을 병들게 함에 틀림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까운 드라이브를 하거나 아니면 여유를 만끽할 또는 자신을 찾아간다는 명목 하에 큰 여행들은 그런 원초적 본능이 서려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이 기술적으로 발전했으며 굉장히 복잡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난 오히려 단순화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철학이니 심리학이니 물리학이니 하는 것은 원래 통합적이었는데 어느 순간 개별적인 학문이 되었고 특히 우리가 자기소개를 할 때 어느 학교, 어떤 학과 몇 살 정도의 자기소개 패턴을 봐서는 사람들은 정의 내리고 한정하고 분절화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행한다. 1인 미디어, 혼밥, 혼족 등의 일종 신조어라는 것들은 그 시대상황이나 세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이 지녀야 할 일종의 트렌드나 관념이라고 주입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난 가끔은 계몽주의가 정말 성공적인 사상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진다. 자신을 알아야 하는 것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저마다 나 자신은 누구인가에 미쳐서 주변에는 안중에도 없다. 나 자신은 누구인가는 나 자신 외에는 관심이 없으며 내가 우선이다라는 생각으로도 변형된다. 내가 저번에 썼던 무관심의 변용 이미지에서는 전자에서 말한 사례들의 연장선상이다. 진짜 나랏일, 국책사업이나 몇 년 후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며 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저 내 미래가 안정되고 보장된 삶이니까 그것이 중요해가 우선인 것일까. 예전에 보았던 명견만리에서 한 외국인 투자자가 말한 문장이 뇌리를 스친다. 안정만을 추구해서는 변화를 꿈꿀 수 없다. 


아주 당연한 것 같고 어쩔 수 없는 변화들이지만 그 안에는 항상 모순과 안타까움이 존재한다. 물론 그것은 나에게도 해당된 문제이기에 참담하다.


시간에 종속되어 또 정신에 종속되어 그 짜증으로 모든 기를 소진해버린 나의 경험이 참 다양한 말들을 내뱉었다. 글은 가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써도 참 재밌지만 분명 교수님들이 읽으며 미치고 팔짝 뛸 글이다. 그래서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에서 다양한 논의나 또 다른 생각의 발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글을 쓰는 편이기 때문에 눈치 볼 것은 없다.


오늘 드디어 뵙기로 했던 타과 교수님을 만나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명백히 말하자면 내가 한 얘기보다 교수님에게 배운 게 많았지만. 

뵙기 전에 난생처음으로 타과 교수님에게 이런저런 기사와 영상들을 받았다. 나는 교수님을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만난 것이 아니라 나와 그의 사상이나 생각의 지점들을 서로 밝히기 위해서였고 그 안에서 약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오용된 머리를 반추하기 위해서도 만났기 때문에 부담은 되지 않았다. 

미술평론이라는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서양미술사나 서구권의 이분법적 모습, 서양적 측면에서의 동양미술 해석은 너무나 흥미로웠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학문이 서구권을부터 기인된 것은 사실이었고 아까 전에 말했던 매력자본이니 문화자본이니 하는 것들 또한 서양의 모티브가 큰 것을 사실이었다. 백색 태닝, 코수술의 서구 외모에 대한 환상과 미리 가공된, '음식'이라고 불리는 초국적기업들의 생산물들의 범람은 참 뭐라 할 말이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 


제안이 아닌 제시를 해주고 정답이 아닌 해답을 제시해준 교수님은 정말 안정되어 보였다. 후학 양성에 대한 의지가 없거나 자신의 철학이 담기지 않은 대부분의 교육자는 다른 사람들의 자료, 지식을 조잡해 수업업을 진행하는데 이런 교육자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 있었다. 교수님이 추천해준 책을 아직 읽지 못했다. 이번 학기는 과감한 결정이 필요하다. 무엇인가 또 다른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곳은 건명원이라는 곳이다.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건명원을 들어가기 이전에 나는 어떤 생각들을 이끌고 벗어내고 채워야 할지 조금 고민이지만 분명 나는 다른 삶을 영위할 거 같다는 직감 때문에 참아내야 할 고통과 갈등은 더욱 많아질 것으로 생각하며 잠을 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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