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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빈 Sep 14. 2018

어색하지는 않은데 불편해

친구들 중에서도 유독 더 좋거나 마음이 가는 친구들이 있다. 그건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대학교 때도 그랬다. 사람이 모든 사람한테 끌릴 수도 없지만 그냥 설명 불가능한 편안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게 있다.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었고 내가 그 친구와 언제쯤 헤어지고 언제 이후로 연락이 끊겼는지는 정말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그 친구가 보고 싶었고 힘들 때 생각이 났으며 뭔가 모를 그 친구의 근황이나 여타 다른 여러 모습들이 종종 생각났다. 하지만 연락은 잘 되지 않았다. 친구가 뭔가 중요한 걸 준비한다는 건 알았지만 만나지 못하는 게 아쉽기만 했던 것 같다.


때는 한 달 전이었는데 우리도 이제 나이가 각자의 먹고살 길, 또는 꿈을 향하거나 현실에 부닥치는 삶들을 살다 보니 시간 맞춰 만나는 게 정말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친구의 결정으로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찾아왔는데 그 시점에 나는 우울증, 불안심리 등으로 매우 극심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터라 친구들을 만나 웃으면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말 미안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우울증 때문에 힘들고 더 이상은 안 될 거 같아서 그리고 너희들을 만나 웃지 못할 거 같다고 하며 나는 그 자리를 나가지 못했다.


그 후에 단톡 방에는 사진 한 장이 올라왔는데 그중 익숙한 얼굴과 함께 보고 싶었던 그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뭐랄까 왠지 모를 서운함과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다. 그 사진은 사실 나에게 어떤 반가움이나 큰 호소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들도 감정적으로 마음적으로 힘든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잘 모를 나이이기는 했다.

모임을 주선했던 친구는 3년 뒤에는 다 같이 여행을 가는 것이라고, 모두가 자리 잡힌 후에는 그리할 것이라고 단언하며 새로 초대된 친구는 짧고 굵은 네라는 답변과 함께 공간에서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이 동네에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몇십 년을 살아왔는데 드디어 새로운 터전으로 아예 정반대의 위치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가까운 친구도 만나기 힘든데 그곳으로 이사 가면 나는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가기 전에 그래도 수환이는 보고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만나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다는 진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분명한 것은 내가 변한 만큼 친구도 변했다는 것이었고 그 변했다는 느낌 사이에는 내가 겪지 못한 친구만의 사건이나 시간들이 복잡하게 뒤엉켜있을 것이다. 내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말에 열에 아홉은 그것은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숙명입니다 라는 반응은 이제 너무나도 익숙하고 상처받지 않는 대목이다. 결국 그 친구도 그렇게 응했으며 힘들게 무엇인가를 준비하면서 받은 심리적 압박이나 우울의 상황이 있었을 것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왜 그런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거나 상황 외적인 다른 시간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좀 의아했다. 혼자 감내하려 한 것일까. 

결국 그 친구와 나 사이의 간극은 이제 무엇인가 불편한 기류만이 남아돈다는 결론밖에 내지 못했다. 사실 며칠 전에도 학교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지만 발랄했던 내가 발랄한척하고 있다는 것과 발랄했지만 이제는 표정과 몸짓이 사라진 친구의 모습이 다소 안타까울 뿐이었다. 우리의 고등학생 때 풋풋함은 정말 어디로 떠나버린 것일까.


친구는 이민을 간다고 했다. 지금 또 그가 준비하는 무엇을 위해 정진하고 있는 그 친구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친구의 인생에서 조금씩 사라져 가는 기분과 함께 나도 나의 인생을 가야겠다는 무언의 느낌이 들었다. 긴 부재의 시간을 가지고 이사를 가기 전 만났던 친구의 첫마디는 '언제든 누군가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약간 나에게는 미안함을 동반한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인생을 준비하는 기간에 바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통용될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삶의 폭이 작아진다라는 느낌도 들지만 적어도 각자가 각자의 삶 외에는 이제 손쉽게 만날 수 없다는 것도 의미했다.


사실 요 근래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불편하지는 않지만 어색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새로 마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었는데 이젠 어색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관계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대부분 내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었고 참으로 아이러니한 기분이 나를 애워싼다. 


각자의 삶을 응원하고 이제는 내가 사라질 시간이다. 친구들은 한 번씩 사라짐을 용인했고 나는 기다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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