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현재, 떠나온 지 281일째

by 파나오

한동안 여정 기록을 한 자도 쓰지 못했다. 쓰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인 채로 두 달은 족히 흘렀다. 답답했지만 답답하다고 답이 나오진 않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걷고, 수영하고, 읽고, 그리고, 엮고. 유랑하는 생활을 하면서 틈새처럼 벌어진 시간들을 혼자 힘으로 채워나가는데 일가견이 생겼다. 물론, 인터넷이 되는 곳에선 하염없이 짧은 동영상의 세계를 헤매기도 했다.


왜 그리도 쓸 힘이 나지 않았을까? 쓸 이야기가 없는 게 아닌데, 오히려 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들은 점점 더 쌓여만 가는데도, 도무지 써지지 않았다. 사진과 동영상들을 백업해 두는 온라인 스토리지에는 벌써 새로운 폴더가 몇 개나 더 생겼는데. 끝내 9월 초에 접어들고, 첫 휴일을 맞은 오늘에서야 오롯이 혼자의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의 좌표가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 그동안 바뀌지 않은 것 -

나는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는 나를 살아가게 한다.

여전히 유랑 중. 다음 여정지가 어디가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비자는 3주 뒤에 만료된다.


- 그동안 바뀐 것 -

망그로브부터 산호초에 이르는, 조간대 해양생태에 대해 배웠다.

바다 관련한 자격증이 두어 개 더 생겼다.

날짜 변경선과 적도를 또 한 번 가로질렀고,

통장 잔고는 빨간 선을 넘나들었다.

쉽게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이 조건들 중에서도 다음의 조합이 유별나다. 나는 여전히 '다음'을 모르겠는 유랑 중에 있다는 것, 그리고 어딘가에 살고 있는 누군가와 사무치게 얽혀버린 것. 어쩌면 이 조합이 한동안 내 감정과 시간, 몸과 생각을 온통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기에 쓸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옛말에 꿀이 묻은 칼날을 핥는다는 말처럼 어려운 조합이다. 지인들이나 친구들은 '어차피 너의 자유로운 선택이잖아. 마음이 간다면 좀 머물러도 되는 것 아니야? 그렇게 아름다운 섬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멋진 일이 어디 있다고.' 하는 식으로 나의 '낭만'을 독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온통 만남과 떠남으로 얼룩진, 짐 싸기와 짐 풀기에 특화된 장기 여행자의 흐름 속에서는 내 여정이 다른 존재와의 '만남'으로 인해 휘어지고, 느려지다 못해 심지어 멈추기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유독 어렵게 다가왔다.


나는 스스로 <떠나기>에 특화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번 여정을 떠나기 전에도, 한 나라나 도시 안에 살 때도 나는 이곳저곳 옮겨다니기를 반복하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 유목 기질의 뿌리에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10살 이전까지 이사를 열 번 넘게 다녔던 성장 배경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그게 특이하다는 걸 모르고 살았고, 알게 된 뒤엔 뿌듯하기도 했다가, 한창 억울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가 이제는 그 빛과 어둠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나의 방랑벽. 거기에 한 술 더 떠 늘 움직이고 변화하며 사람을 밀고 당기는 <바다>를 향한 사랑까지 더해진 것이다. 정착과 유목의 차이란 어쨌든 상대적이고 애매한 지점이 없지는 않으나, 스스로를 유랑 중이라고 정체화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내 삶이 계속 흐르고 움직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다랗게 있어왔다. 그런 가운데 너를 만난 것이다. 너나 내가 어떤 선명한 '결정'을 당장 서로에게 요청한 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한 달보다는 훨씬 오래 함께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느꼈다.


1차의 답을 내리자면 우선은 나의 유랑을 이어가기로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지금도 도무지 모르겠으나 어찌 저찌 떠나왔다. 그런데 그러고도 줄곧 연결되어 있었다. 하루도 연락하지 않고 지난날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결국 그가 나를 보러 왔고, 한 달짜리 두 번째 데이트(?)를 시작했다. 그 한 달이 막 끝나고 나서야 좀 마음의 폭풍이 잠잠해지는 것 같다.


다른 누군가나 무언가를 아무리 깊이 원하고 사랑하더라도, 나의 삶을 향한 사랑을 지속하면서 함께해내고 싶다. 그렇게 기세 좋게 선택해 놓고도 울며 불며 후회하고, 찌질하게 푸념하곤 한다. 그런 불안정한 내 모습도 사랑해 주기를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