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애매하게 뜬 금요일 오후,
새로 시작하는 에세이 편집에 참고할 겸 교보문고를 들렀다.
2주만에 온 교보문고 신간 코너는 절반정도 책이 바뀌어 있었다.
그 중 짙은 파랑색 표지에 노랑띠지 책 한권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마침 이메일 마케팅에 부쩍 관심이 많아진 것을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차린걸까.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 하듯 몇 번이나 책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한 권을 집어들고 서점을 나섰다.
내가 이슬아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얼마전이다.
<일간이슬아>의 시작이 2018년임을 감안하면 뒤늦은 관심이다.
<일간이슬아> 라는 구독형 컨텐츠는 알고만 있었고 작가의 책은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지난 달, 갑자기 글이 써지지 않아 유튜브 글쓰기 강의를 미친듯 떠돌던 때에
이슬아 작가의 세바시 강의를 유심히 들었던 것이 작가와 나 사이의 유일한 연결점 이었다.
그럼에도 책을 뽑아 들게 한 것은 강렬한 표지와 제목때문이었다.
“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
자그마치 ‘인생을 바꾸는’ 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나왔다.
얼마나 대단한 내용이 들어 있길래 이렇게나 자신감 넘칠 수 있는 걸까.
표지에 삐딱하게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이슬아 작가가
‘니가 이 책을 보고도 안 살수 있는지 두고보자’라며 말하는 듯 하다.
나는 이런 것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반드시 사주마’라는 생각으로 구매를 결정했다.
다음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에서 말하는 에세이의 정의다.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 작가의 개성이나 인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유머, 위트, 기지가 들어있다.= 수필
주로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는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수필. 비개성적인 것으로, 비평적 수필, 과학적 수필 따위가 있다. = 중수필
'자신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형식의 글'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에세이가 맞다.
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실용서 혹은 자기계발서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종일관 이메일의 비법을 전수한다.
이메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름을 틀리지 않는것,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을 하는 법,
협업을 위해 분명히 적어야 하는 것(시간, 내용, 기한),
잘 거절하는 법 등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메일 스킬이 줄줄줄 이어진다.
이메일이 아니라 연애편지를 쓰는 듯 하다.
일 때문에 만난 사람이 이렇게 정성들여 메일을 보내면 어느 누가 흔들리지 않을까 싶다.
책의 제목이 그토록 자신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아, 정말로 인생이 바뀔 수 있겠구나...'
책을 덮을 때가 되면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이메일 기술을 배운걸까?
살아가는 기술을 배운걸까?
상대의 이름을 틀리지 않게 불러주는 것
(이왕이면 더 멋지고 특별하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첫문장(제목)에 공 들이는 것
(복붙은 안된다.)
사과는 상대의 기대보다 빠르고, 크게 하는 것
(많이 늦었더라도 안하는 것보다 낫다.)
이런 것들이 비단 이메일에만 적용되는 기술일까.
아니다. 이메일을 잘 쓰는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더 잘 살아가기 위한 이야기 였다.
이메일이
사람과 사람을 잇고, 일과 일을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현대사회에서
이메일을 잘 쓰는 것은 곧 관계를 잘 쌓아가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타인과 함께 제대로 살아갈 줄 아는 사람만이 마음을 움직이는 이메일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이치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말한다.
(작가의 육성이 담긴 QR을 제공하기에 굳이 들어 봤다.)
재주를 한껏 부리며 쓴 책으로, 그간 새침하게 대해온 자기계발서 매대에 가려고 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무한성장주의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 그 매대에 나는 자주 질려버리곤 했다.
무슨 책이든 어떻게 남들보다 더 가질 것인지로 귀결되는 시장을 지독하게 놀리고 싶었다.
문학이 받는 사랑의 수십배를 자기계발서가 받았기 때문이다.
시치미 떼고 자기 계발서 매대 안으로 숨어들어가 강력한 문학 폭탄을 투척하고 싶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제는 이 글들이 어떤 장르로 불려도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이게 자기계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이게 문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어느 쪽으로 팔리든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이슬아,<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 p.273~274
나는 이슬아 작가의 책을 에세이 코너에서 발견했다.
자기계발서 매대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이슬아 작가의 목적은 꺾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에세이로 시작해서 실용서의 내용을 말하곤 독자의 삶을 계발하는 근본적 이야기에 닿는다.
나는
자신의 엄마를 취직시키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책을 샀다가,
이메일을 잘 쓰는 법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책을 덮으면서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슬아 작가는 목적을 이룬듯 하다.
"인생을 바꾸는" 이라는 자기계발서스런 제목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책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문학의 숨이 빠짐없이 녹아있다.
나는 작가가 의도하는 메세지가 분명한 에세이가 좋다.
어영부영 좋은 말만 적혀있거나 새벽감성만 담긴 에세이는 공허해서 숨이 막힌다.
그런면에서 백점짜리 책을 만난 기분이다.
이슬아 작가 특유의 빠르고 분명한 문장이 시종일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간다.
상대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 인생을 바꾸는 비결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 하다.
하다 못해 블로그 댓글을 하나 달더라도 마음이 담기면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다.
나는 오늘 진심을 담아 글을 썼는가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다만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오후에 산 책을 저녁에 완독해버렸다는 것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