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이 되는 존재에게 얼굴은 필수 조건이 아니다.
원작 소설은 번역판이 나오자 마자 샀는데, 두께에 질려 아직 안 읽었다. 영화는 개봉 첫 주 주말에서 봤는데, 다른 일에 바빠서 감상평을 늦게 쓰게 되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소감 위주로, 본 사람과 의견 교환을 위해서, 읽을 사람은 읽으라는 마음으로 쓴다.
태양에너지를 흡수하는 '아스트로파지'라는 우주 미생물이 태양계에 번성하면서 지구가 빙하기 이상으로 냉각될 위기를 앞두고, 12광년 떨어진 타우세티 항성계가 아스트로파지에도 멀쩡한 것을 확인한 지구인들은 그곳에 탐사선 헤일메리호를 보내기로 한다. 탐사선에 탄 3명의 승무원은 미션에 성공해도 지구로 귀환할 수 없는, 편도여행을 해야 한다. 주인공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그중 하나이다. 하지만 가사 상태에서 깨어 보니 기억 상실 상태였고, 다른 동료들은 죽어 있다. 자신의 상황을 하나하나 파악하면서 자신이 12광년 떨어진 우주에 홀로 남겨진 것을 알게 된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거기서 본인이랑 같은 목적으로 가진 외계인 록키와 조우하고, 둘이 힘을 합쳐 미션을 해나가게 된다.
남들이 말하는 원작과 차이점을 들어하니, 상영시간이 한정된 영화에서 연출하기 힘든 장면은 과감히 생략하고, 스크린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 최대화시켰다. 결국 잘된 각색이 아닐지. 원작을 그대로 재현시키겠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목표이고, 이만하면 까다로운 하드 SF로서 훌륭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에바 스트라트 캐릭터에 대해서도 나는 각색이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로봇 같은 공리주의자였으면 정이 안 갔을 듯.
라이언 고슬링의 처진 눈은 확실히 무기력함과 로맨틱함 둘 다를 가지고 있다. 이보다 좋은 캐스팅이 있을까 싶다. 문득 눈 처진 남자를 선호하던 어떤 후배가 떠오른다.
록키. 내가 얼굴이 없는 존재를 보고 참을 수 없는 귀여움을 느낄 줄이야. 작중에 연출된 소통 방법이 좋았다. 학습형 AI의 순기능이랄까.
메리(헤일메리호 AI의 별명). 역할이 작아서 아쉬웠다. 나는 셋이서 농담 따먹기를 할 줄 알았는데.
사실 타우세티까지 12광년이라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해도 12년이 넘게 걸린다. 빛의 속도까지 가속하고 다시 정지할 때까지 감속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당 항성계는 실제 타우세티가 아니라 아스트로파지 동력으로 갔을 때 12년 걸리는 가상의 항성계라고 보는 게 맞다.
한편 우주선이 아광속으로 간다면 선내에서는 확실히 시간이 천천히 간다. 식량이 충분하다면, 선내 시간으로 2-3년 만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좀 식량을 넉넉히 싣고 맨 정신으로 보내는 건 어땠을까? 그랬다간 선내에 싸움이 나서 프로젝트는 실패했겠지.
근래 꾸준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가,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개체들의 공생이다. 이 작품에서는 서로 못 싸워 안달이던 지구인이 위기 앞에서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주인공과 록키는 의사소통도, 생활환경도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협력하고 희생하며 모든 난관을 헤쳐나갔다. 어찌 아니 좋을 쏘냐.
2025년에도 〈미키 17〉이라는 괜찮은 SF 영화가 있었음을 잊지 말자.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은 작품:
TV 시리즈 『스타트렉 디스커버리』(2017~2024)
멀린 셀드레이크 저,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아날로그(글담), 2021.
※ 위의 두 작품은 '폴 스타메츠(Paul Stamets)'라는 이름의 학자로 연결된다. 특히 전자는 우주 미생물과의 공생이라는 측면에서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프레데터: 죽음의 땅』(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