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라떼의 맛

어 홀 뉴 월드(A Whole new world)

by 저녁바람

스물 세 살 때, 휴학을 하고 창신동의 작은 보습학원에서 중학생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인터넷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간 그곳은, 유명한 체인 학원의 로고와 이름을 쓰고 있었지만 실은 아무 관련 없는 그냥 동네 개인 학원이었다. 원장이 수학을, 와이프인 부원장이 영어를 그리고 그들의 친구이며 대학동기인 남자 선생님이 과학을 가르쳤는데 모두 스물 여덟 살이였고 선량했지만 촌스러웠다.

아이들은 모두 그 근처 낡은 빌라촌이나 달동네와 땅동네의 중간 어디쯤 살았고 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많고 불량한 여자애 한 명이 있었는데 엎드려 자다 쉬는 시간에 계단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것이 주 일과였다. 그러나 원장은 그 애를 내쫓지 않았다. 부모들은 학원비를 늘 밀리기 일쑤였고 그 애의 아버지는 당구장 사장으로 그 중 가장 학원비를 잘 냈기 때문이었다.

세 달 째 정도 되었을 때 사건이 터졌다.
문제의 그 여자애가 학원의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사탕과 초콜렛을 선물했는데 그 남자애가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선생님들 드시라며 하필 지나가던 나에게 그대로 줬던 것이다. 무릇 사춘기 여성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알래스카에서도 땀 날 일이 생기는 법. 그 아이 주동으로 여학생들이 내 수업을 보이콧했고 영문을 모른 채 텅 빈 수업실에 들어선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칠판에 쓰인 "쌍년 꺼져"라는 글귀였다.

그날 밤 한바탕 소동 후 아이들이 하원하고 퇴근하려던 밤 열 시 무렵. 술 취한 아저씨가 걸걸한 목소리로 국어 선생을 찾으며 학원문을 밀고 들어왔다. 당구장 사장님, 아까 그 문제의 여자애 아버지였다.
죄송하다며 술 한 잔 살테니 기분 푸시라는 말에 웃으며 아버님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지만 분명 내 말투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스물 셋 그 즈음의 나는 그러했다.

다음날 학원을 그만 두겠다 했을때 원장으로부터 그 여자애와 아버지의 행동은 유독 여자 선생에게 상습적이란 사실을 들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나에게 3개월은 이미 긴 시간이었다.

마지막 수업때 문제의 그 남학생이 선생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 노래만 모았다며 cd를 한 장 건넸다. 아직 더 담아야하는데...라며 못내 아쉬워하던 그 cd의 1번 트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의 주제곡 ' A whole new world' 였다. 그 아이는 부모님이 안계셔 할머니와 동생과 셋이 살았는데 반에서 국어를 가장 잘했고 또 좋아했으며 꿈이 소설가라고 했다.

그 날 수업이 일찍 끝나고 원장과 부원장 과학선생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의 선생이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학부형이 운영하는 기사식당 스타일의 작은 백반집이었는데 낡을대로 낡은 주택을 개조한 데에 살림방과 식당의 경계가 모호했다. 끈적이는 장판과 누렇게 변색된 벽지에 둘러싸여 삼천 오백 원 짜리 된장찌개를 먹으며 과학선생이 말했다. 홍 선생님처럼 매력적인 아가씨와 함께 일해서 정말 즐거웠어요. 밥을 다 먹고 더치 페이로 밥값을 치르고 그들과 함께한 나의 삼개월 아르바이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일곱 살 딸아이가 좋아하는 디즈니 공주 드레스를 치우다가 문득 '어 홀 뉴 월드' 가 생각났고 또 그 노래를 듣자하니 그 남학생 생각이 났고, 또 그 시절 스물 셋의 내가 생각나서 이 긴 글을 쓰고 있다. 나에게 CD를 선물한 남학생이 꿈을 이루었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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