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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라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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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바람 May 17. 2024

오늘치의 행복

그럴때가 있다. 잊고 있었던 작고 큰 슬픔과 고통의 순간들이, 또는 분노와 이불킥의 순간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날 말이다. 아주 사소한 단어나 장소 혹은 냄새가 트리거가 되어 검은 물감을 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는거다.


주말에 수원 스타필드에서 즐거운(?) 웨이팅 지옥 체험(?)을 하고 돌아오면서 남편과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아마도 뭐 요즘 젊은애들은 쇼핑몰에서 큰 세대라서 우리와는 다르다, 우린 아파트 상가, 지하상가 세대 아니야? 이런 얘기였던 듯.


나도 쇼핑몰 세대야, 나도 롯데월드와 코엑스에서 놀았다구 라고 대꾸하다 시작됐다. 앞유리창에 빗방울이 세차게 내리치고 와이퍼가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는 순간.. 이십 몇 년도 더 전, 비오는 어느 날 코엑스 앞에서 장우산으로 내 머리를 내려쳤던 A, 뺨으로 흘러 입술을 적셨던 빗물 섞인 피 맛이 떠올랐다.


얼마전 반려견을 무지개다리 건너로 보내고 힘들어하는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일상에서도 깜박깜박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슬픔을 지우기 위해 모든 기억을 지우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ㅠㅠ


나역시 강제적 망각이 '아직은' 필요한 사람이다.  '빗물 섞인 피 맛' 같은 기억 때문에 코끝이 차가워지고 한여름에도 극세사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어야 숨이 쉬어지는 순간이 때때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럴때 스스로 터득한 몇 가지 응급처방법이 있다. 뇌를 꺼내서 차갑고 맑은 계곡물에 씻는 상상을 한다. 또는 가상의 스위치를 만들고 라벨을 붙인 뒤, 스위치를 끈다. 마지막으로, 잠자리가 그려진 커다란 톰보우 지우개로 슥슥, 지운다.('지우는 상상'을 한다)    


그러다보면 내 친구처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게 된다. 그때 분명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선 예쁘고 반짝였을텐데, 행복해서 활짝 웃었을 텐데, 당췌 그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거다. 슬프다..


누구나 알고 있어도 잘 되지 않는 진짜 처방이 있긴 하다. '오늘'을 사는 거. '오늘의 행복'을 느끼는거. 작은 행복을 차곡차곡 주머니에 모으는 거. '빗물 섞인 피 맛' 따위가 스며들어도 상관없도록 빼곡히 단단하게.


그래서 오늘치 행복을 모아 보았어요. 졸렸지만 일어나서 수영을 갔고, 덕분에 수영 친구에게 가을이 생일 선물을 듬뿍 받았고, 일찍 출근해서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이렇게 내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그 다음은, 신의 뜻대로.

나무아미타불 아멘, 인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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