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우뚝 서길 기다리는 예수님
중국 고전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유명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삼고초려‘, 즉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사자성어가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중국은 후한 왕조가 무너지고 수많은 군웅들이 나라를 차지하려 싸우던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유비는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세력도 약했고, 전략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듣습니다. “와룡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와룡은 바로 제갈량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좇지 않고 시골의 허름한 초가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유비는 그를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갑니다. 꽤나 먼 길을 떠나 힘겹게 제갈량을 찾아갔지만, 유비는 그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얼마 뒤 다시 그 먼길을 떠나 그의 집을 찾아갔지만 역시 이번에도 그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전화로 만남을 예약할 수도 없고, 당장 있는 곳을 GPS로 확인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유비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두번의 실패 이후, 유비가 제갈량을 세번째 방문했을 때, 드디어 그 집에는 제갈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갈량이 유비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이유가 황당합니다. 자신이 지금 낮잠을 자야한다는 이유였습니다. 함께 있던 일행들이 유비에게 분노하며 자신들처럼 높은 자들이 이렇게 대접을 받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자, 유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천하의 인재를 모시러 왔는데 어찌 이 정도를 참지 못하겠는가?” 유비는 그 허름한 집 앞에서 몇 시간이고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갈량이 유비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비의 모습을 본 제갈량은 이 사람이 권력으로 사람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심과 겸손으로 사람을 얻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갈량은 결국 유비의 사람이 되었고 놀라운 전술과 지혜로 적벽대전에서 숙적 조조를 꺾는 핵심 주역이 되었습니다.
삼국지연의의 이 장면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와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 즉 이방 여인이었던 그녀에게는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자신의 딸을 낫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그녀는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22) 그녀의 외침이 얼마나 크고 거절하기 어려울 만큼 간절했는지, 제자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그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매우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 여성의 간절한 간구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번엔 여인이 외침에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 곁에 무릎을 꿇고 간청하며 말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25) 그러자 예수님은 더욱 냉담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녀들이고, 이방인인 여인은 개라는 표현을 쓰며 여인의 간구를 매몰차게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유비가 제갈량이 아니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낮잠자는 그의 곁에 머물렀던 것 처럼 예수님의 두 번의 거절에도 그 자리를 뜨지 않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 여인에게서 이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고 그때로부터 그녀의 딸이 낫게 되었습니다. 두 번의 간절한 간구를 거절하고, 마지막 세 번째의 지혜로운 대답을 통해 마음의 소원을 이룬 이 여인을 보며 우리는 인내와 믿음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 한 유비와 가나안 여인은 세 번이나 자신의 간절함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이것은 곧 처음 두 번의 실패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실패에 좌절하지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태도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에 대한 간절함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세 번째 간구에 힘을 더해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오늘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 하기 위해 바울의 말을 뒤집어 보자면, 소망을 만드는 것은 연단이고, 연단을 만드는 것은 인내이며, 인내를 만드는 것은 환난이라는 말입니다. 연단은 시험을 통과해 검증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금을 불에 넣어 모든 불순물을 제거한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금이 사람들에게 ‘순금‘이라는 칭함을 받을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가 된 것처럼, 연단을 거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세상에 드러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단을 낳는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순금‘이라는 상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과정을 견뎌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수 많은 부하를 거느린 장수였던 유비가 허름한 초가집 앞에서 간절히 제갈량을 기다린 것 처럼, 예수님의 두 번의 거절과 개들이라는 치욕적인 비유를 들었음에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간구했던 여인처럼 연단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을 제련하는 뜨거운 불은 금이 아닌 모든 것을 불살라버립니다. 이것을 사람을 비유하면, 결국 연단의 과정은 우리에게 본질이 아닌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우리의 모습을 서서히 바꾸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불이 몸에 닿으면 본능적으로 회피하는 습성처럼, 우리는 연단의 과정을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성령을 받고 이방인에 대한 환상을 체험했던 베드로 조차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오자 외식함으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몸에 남은 습성과 관습이 말씀으로 얻은 지식을 밀치고 튀어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이 습성을 이겨내기 위해선 반드시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불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한다는 확신입니다. 유비는 제갈량이 아니면 안됐고,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 아니면 안됐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확신이 자신의 모든 생각과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가나안 여인의 청을 거절할 때, 본질적으로는 거절의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대답을 이상하게 여긴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자를 거절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매몰찬 거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끄집어 내기 위해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설계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시험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 이처럼 믿음이 훈련되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조금도 부족함 없는 자들로 세상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를 세상에서 부족함 없는 자로 세우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과도 비슷합니다. 얼마전 셋째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어릴 때는 아빠가 원하는 걸 모두 해 줬는데, 크니까 모두 다 해주진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배움에 한계가 있습니다. 어린 아기는 영양이 풍부한 고기를 줘도 먹을 수 없어서 그에게 우유만 줘야 하는 것처럼, 아직 중요한 배움을 체득할 수 없는 아이에게는 세상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다릅니다. 이제 스스로 감당해야 할 자신의 일이 많아지고, 부모와 지내는 시간보다 밖에서 선생님과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집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줄 때가 아니라, 세상을 먼저 경험한 부모로서 아이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해 줘야할 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장성하게 해 주시는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 믿을 때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를 통해 내 간구가 쉽게 응답되는 것을 경험하지만, 믿음이 자라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우리의 간구를 꺾기도 하며, 인내함으로 그 응답을 끝까지 기다리게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들이 세상에서 바로 서도록 그들을 사랑으로 훈련시키는 것 처럼, 하나님 역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부족함 없이 설 수 있도록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즉, 거절은 우리를 유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서게하는 한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 한 켠에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우리의 믿음이 한뼘 더 자라는 것이 보다 중요하므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멈추게 하십니다. 그것은 거절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나를 향한 공격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함으로 끝까지 말씀곁에 머물러 기다린다면, 우리는 그 여인이 들었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과 함께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큰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두 번의 거절에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유비는 두 번의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유비에게 제갈량은 반드시 얻어야 할 사람이었고,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은 반드시 붙잡아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존심도 내려놓고 모역처럼 들리는 말도 견디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거절 아닌 거절에 속아 유기당한 것처럼 아파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 그 아픔까지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께 모든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두 번의 실패를 넘어 이제 마지막 믿음의 삼고초려라는 관문을 넘어설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