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감독을 잊지 말것
요즘 영화관은 매우 분주합니다. 2년만에 천만 영화가 개봉해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화는 바로 “왕과 사는 남자”입니다. 저도 어제 아내와 함께 극장을 찾아 영화를 봤는데, 예매를 하지 않았다면, 영화를 볼 수 없을만큼 관객들이 영화관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 영화는 어린 나이에 역모로 폐위 된 단종이 유배지에서 겪는 삶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는 영화의 후반부에 자신을 도와 왕권을 다시 돌려놓으려는 금성대군에게 편지에 이러한 내용을 씁니다. 비록 거사가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자신들의 노력을 후세가 보고 배울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하는 편지입니다. 한국의 천만 영화 중에서는,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루는 영화들은 이러한 주제를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류를 이루는 불의 속에서 정의를 세우기 위해 고구분투하는 소수의 인물들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영화를 통해 관객으로서, 그리고 그들의 후손으로서 그들의 선택을 공감하고 응원합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참으로 처절합니다. 과거 어느 역사를 훑어봐도 매번 주변국으로부터 위협과 침략을 벗어난 적이 없고, 그러한 위협이 없을 때면 피튀는 내전으로 나라가 분열되는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다행인것은, 수 많은 우리나라의 영화가,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 처럼, 우리 국민들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는 그것이 비주류요,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음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후세를 위해 그러한 의로운 선택을 내리는 선조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적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후세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하늘의 상급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세상의 불의를 부끄럽게 여기며 목숨을 바치는데, 하늘의 상급을 알고 있는 우리가 세상의 악한 권세와 피흘리며 싸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 기록된 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마음에 도전을 주는 것 처럼, 우리 역시 사도행전 이후에 보이지 않는 성경을 써 내려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후세에 전할 믿음의 싸움을 기록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 승리가 당장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싸움은 우리의 자식과 또 그 자식의 자식을 통해 구전되고 더 나아가 온 땅의 만물과 하늘의 천사들과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예수님에 의해 기록되고 일컬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 우리는 첫째, 함부로 주류에 편승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당시 주류였던 것들이 항상 옳았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주류는 바리새인들이 이었고, 초대교회 당시 주류는 로마 제국이었으며, 종교개혁 이전 주류는 타락한 교회 권력이었습니다. 모세 당시 주류는 이집트였고, 여호수아 당시 주류는 가나안 민족이었으며, 왕정시대 당시 주류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바벨론과 앗수르였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어느 역사에서도 하나님은 주류를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역사를 통해 진리를 끝까지 붙드는 소수를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결국 주류는 믿음의 사람을 훈계하는 막대기요, 믿음의 사람들의 승리의 전유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에 편승하지 않는 주류는 그 크기가 클 수록 그 무너짐이 더하며, 그들이 지닌 권세가 클 수록 믿음의 역사는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친구와 인도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교과서에서만 봤던 타지마할이라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역사를 잘 알지 못하고 들어가면 그곳은 마치 궁전처럼 보입니다. 하늘의 빛을 그대로 반사하며 빛나는 하얀 건물은 심지어 지상의 천국 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약 5만평에 이르는 대지에 지어진 이 건축물은 사실 무덤입니다. 샤 자한이라는 황제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무덤으로 수십년간 엄청난 노동력을 쏟아부어 만든 무덤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건축물을 보며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한 사람의 죽음 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무덤과 매우 대비됩니다. 한 때 있던 그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아무도 없는 무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을 통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한 사람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삶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주류라 불리는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쌓고 주변의 관심과 시선을 모아 칭송받는 삶을 산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인도의 거대한 한 무덤처럼 자신의 죽음을 더욱 명백하게 보여주는 ’죽음의 상징물‘이 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에게 바로와 그의 나라는 호화로운 궁전과 같았으나, 홍해 앞에서 그것은 거대한 무덤이 되었습니다. 바벨론과 전쟁을 치루는 이스라엘에게 골리앗은 넘을 수 없는 태산 같았으나, 다윗 앞에서 그것은 발 아래 놓인 작은 무덤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주류라는 무덤에 머물러 그곳의 주인이 되지 말고, 그곳을 속히 벗어나 그들을 믿음의 전리품으로 취하는 승리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가 주류에 편승하지 않는 것이라면, 둘째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영화 속 단종이 비록 거사에 실패한다 할지라도 후세가 이 역사를 보고 배울 것이라 말한 것처럼, 그리고 많은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이 당장의 성공에 마음이 미혹되지 않고 다가올 최후 승리를 바라본 것처럼 우리 역시 현재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의 배를 위해 거짓 예언을 할 때,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는 일로 오랜 시간동안 조롱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후에 포로생활을 하며 왕후가 된 에스더는 포로 중에서도 가장 출세한 포로가 되어 유망한 앞날이 예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백성을 위해 죽으면 죽겠다는 다짐으로 왕 앞에 서는 도전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더처럼 느부갓네살의 신하로서 앞날의 꽃길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여 사자굴에 던져지고 풀무불에 던져지는 잔혹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풀무불에 던져지는 다니엘의 친구들은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푸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어리석은 사람은 눈 앞에 주어진 것만 바라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앞에 곧 닥치게 될 미래를 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삶이라는 시간의 틀을 벗어나 영원한 것을 바라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말한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라는 이 믿음의 고백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이 땅이 아닌, 저 하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을 포함한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일로 감옥과 핍박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위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새 부대를 얻기 위해 이전 부대와 오래된 포도주를 버리는 것을 아까워 하지 마십시오. 잠시 잠깐은 우리가 빈 손인 것 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 새 부대에는 새로운 포도주로 넘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우리는 이미 하늘의 관중 앞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한편이 영화화 되어 극장에서 수많은 관객을 통해 보여지는 것 처럼, 우리의 삶은 이미 주변의 사람들 뿐 아니라, 하늘의 관중, 즉 믿음의 선진들과 하늘의 천사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관중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 12:1) 즉, 우리의 삶은 앞으로 누군가가 들쳐내 줘야만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삶이 모두 명명백백히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서 우리의 삶을 드러내게 될 날이 옵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5) 우리의 삶이 한편의 영화라면, 그 영화의 감독은 하나님입니다. 믿음을 주제로 한 편의 영화를 찍는 이 감독은 우리의 삶에 다양한 역경과 고난을 주며 그 시험을 감당하고 이겨내는 주인공의 믿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제 영화 한편을 모두 찍고 우리의 삶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서 이제 그 영화를 함께 봅니다. 그 때, 우리는 믿음을 보여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공적을 나타내는 불이 우리가 삶에서 세운 것을 시험할 때, 과연 무엇이 그곳에 남아있게 될까요? 맹렬히 타는 불 속에서 살아남은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우리를 심판하는 맹렬한 불 속에서 믿음을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후세에 믿음을 써 내려가기 위해 첫째, 함부로 주류에 편승하지 마십시오. 둘째,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사십시오. 셋째, 우리는 이미 하늘의 관중 앞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살아간다면, 저 하늘에서는 천만 관중의 영화보다 더 크게 칭송받고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