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art)과 목회(ministry)

삶이 예배가가 될수 있다면

by Sue Park



저는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호주에서는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라인에서 쓰는 대부분의 아이디는 미술과 신학이라는 ‘artandministry’ 입니다. 참 단순하죠. 하지만 이 미술을 나타내는 ‘art’와 신학과 목회를 나타내는 ‘ministry’는 제 삶의 이야기에서는 각각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대학교 유일한 동기이자 선배인 분을 만났습니다. 결혼식 이후에 처음봤는데, 벌써 자녀가 둘에 첫째는 이번에 입학한다고 합니다. 그 선배가 제게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요즘에는 그림을 좀 그리니?”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형이 볼 때, 저는 대학교 때 어떤 학생이었어요?”, 그러자 “너는 참 열심히하고 진지한 학생이었지. 그래서 난 너가 화가가 될거라고 생각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정말 화가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을 갈 생각으로 군대를 전역 하자마자 누나가 먼저 가 있는 호주로 떠났습니다. 적응할 필요 없이 하루라도 빨리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머리를 쓴 것입니다. 이후 뒷 부분을 모두 생략하고, 지금으로 돌아와 봅시다. 저는 지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닫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위대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반 고흐라는 사람이죠. 이 사람은 죽는 날까지 자신의 그림을 하나밖에 팔지 못했던 가장 불쌍하고 가장 가난한 예술가 중 한명이었으나, 지금은 그가 가진 예술성과 진정성을 인정받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대학생 때, 발표를 위해 고흐와 관련된 책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누군가로 인한 기쁨 때문에,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보면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실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림이 자신의 삶이었고,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감정과 상황이 그것에 영향을 줄 뿐이었습니다. 즉, 그에게서 그림은 그의 인생 그 자체였던 것이지요. 전 그림을 그리면서 이러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과제를 해야 해서, 혹은 상을 받기 위해서, 때로는 재료 연구를 위해서 그림을 그렸지, 내 인생의 호흡처럼 그림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대학생 내내 장학금을 받고 미대 전 학년을 대상으로한 대회에서 1등을 할 만큼 사람들은 제 그림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속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술가의 생각과 그림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낸 노력으로 인한 것이지, 그림 자체를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예술가적 기질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art’에서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그럴듯하게 잘 흉내내는 사람이었지, 그것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으니까요. 그렇다면 현재 진행중인 ‘ministry’는 어떨까요? 저는 제 아이디 ‘artandministry’에서 비록 예술에서는 실패했으나, 동일한 과정을 신학과 목회에서는 밟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보면, 주인공이 순례자의 길을 가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은 ‘두려움’, ‘수치심’, ‘신실‘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어 순례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유추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 모든 인물 중, 주인공과 함께 마지막 관문인 ‘천성문‘앞에 도달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무지‘입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주인공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모든 것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선한길에 서고 악한 것을 미워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성의 문 앞에서 천사들에게 결박당해 내어 쫓기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겉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여 속사람이 변화된 흔적이 없었습니다. 천성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그 증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예술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와 매우 비슷합니다. 주변 많은 사람들은 제가 그린 그림을 보고 ’좋은 그림‘이라고, 저를 보고 ’좋은 예술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본질적으로 그림은 제 인생 자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천성문 앞에서 쫓겨난 ‘무지‘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심지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첫째,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 비밀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보다 명확해 집니다. 그는 이 거듭남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해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냐고, 부모의 몸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하냐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거듭남은 겉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우리의 속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깨닫는 데서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 우리의 선생이 되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이것을 깨닫고 해결 방법을 찾아 나서는 것이 구원의 첫 단계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양심을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정해 둔 도덕적 기준으로 볼 때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길을 가다 어떤 지갑을 주었습니다. 그 안에는 많은 돈이 들어 있고, 그 안쪽에는 그 지갑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신분증도 들어 있습니다. 저는 분명 여러분이 이러한 지갑을 줍는다면, 그 안의 내용물은 손대지 않고 주인에게 돌려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갑안에 있는 모든 돈을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여러분에게 알려줍니다. ”지갑을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 좋은 일이야.“ 여러분은 그 양심에 순종한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양심에 귀를 닫은 것입니다. 자, 그럼 누가 의인입니까? 죄송하지만, 두 사람 모두 죄인입니다. 애초에 양심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두 사람 모두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가져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쪽 저울은 죄와 의라는 좌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이라는 마음으로 오른쪽 추를 누르지 않으면, 언제나 죄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회개하고 노력해도 가만히 있으면 죄로 마음이 기울여 지는 매우 곤고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겉사람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이 죄로 기울어진 무게추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꾸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속사람, 즉 우리의 신분 자체를 하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육신에는 죄가 있으나, 예수님의 보혈이 이 모든것을 씻어내 완전히 새로운 신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혈의 은혜요,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러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을 경험하면, 이제 거듭남 만큼이나 중요한 두번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을 맛보고 그의 말씀을 깨달아 그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해서 다시 자신의 정욕에 빠지는 자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개가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 처럼, 돼지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는 것 처럼, 깨끗함을 받은 자가 다시 멸망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후메네오는 진리를 깨닫고 교회를 세우는 동역자였으나, 후에 변질하여 그릇된 지식을 자신의 지혜인것처럼 꾸며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겉으로 볼 때 신실한 자들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세상과 타협하며 위선을 보이는 거짓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데마는 바울과 많은 사역을 함께 했으나, 결국 세상을 사랑해서 교회를 떠난 자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에서도 변절자를 볼 수 있습니다. 1900년대 일제 시대를 겪은 우리나라는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몇몇의 민족의 배신자들로 인해 큰 위기를 맞았지만, 또 여러 위인들 덕분에 나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 중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지 못해 이쪽에도 저쪽에도 섣불리 의견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가진것을 모두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했고,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을 민족의 배신자로 명시하고,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운 사람들을 구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광복이 된다는 것을 모든 국민들이 미리 알고 있었다면, 당시 중립적인 입장에서 의견을 내지 않았던 대부분의 국민들은 일본과 맞서 싸우지 않았을까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이처럼 중립적인 입장을 없앱니다. 이것을 우리의 믿음으로 적용한다면, 천국을 아는 사람이 세상을 사랑해서 적당히 타협을 보는 삶을 살아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오히려 그들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은 사실 그들이 가진 믿음이 가짜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금은보화가 가득 숨겨진 밭을 두고 ”아, 그것은 정말 확실한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당장 그 밭을 사기에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그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믿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지금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팔고 빚을내서 주식을 사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매번 오르는 것을 보니, 내일도 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누구도 오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기대가 이러한 행동을 낳는 것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확신할 수도 없는 일에 세상 사람들은 이토록 열성과 열심을 보이는데, 혹시 우리는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두고 말로는 확실하다 하면서 내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사는데는 주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많은 국민들이 1900년대 독립을 위해 싸우지 않았던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국민들이 여전히 주식을 사지 않는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적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도 역시 ’불확실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불확실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의 보험을 물질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계산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장사지낸 마리아의 행위를 보고 그녀가 깨뜨린 향유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했던 유일한 사람이 가룟유다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반면 믿음의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물질을 보험으로 삼지 않습니다. 어제 저는 구리에 있는 드림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목회 지원금을 드리기 위해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교회를 확인하고자 잠시 들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좁은 골목 한 편에서, 한 품도 되지 않는 작은 간판을 걸고 지하 한칸을 쓰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 들어가 목사님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목사님의 입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하신 놀라운 일들과 감사한 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실 저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와서 목사님께서 신세 한탄과 같은 어려움을 토로할 줄 알았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감사와 찬양이었습니다. 작년까지 다른 교회에서 오랜 기간 목회 후원금을 어느정도 받고 있었는데, 해당 교회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어 올해부터 그 후원금이 끊겨 기도를 하는 중에 제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목사님과 삶의 참된 기쁨과 본질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비록 삶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해 그림 한 점 팔기 어려웠던 화가였으나, 죽고 난 뒤에는 그의 예술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받았던 고흐처럼, 목사님의 삶도 비록 지금은 그 진가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고 당장에는 빛이 보이지 않지만, 저 천국에서는 그 누구보다 큰 믿음의 용사요, 선한 천국의 백성이라는 칭함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십시오. 이생의 자랑과 정욕으로부터 마음을 돌이켜 하늘의 상급을 추구하십시오. 지금은 비록 허허벌판처럼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그 밭에 삽을 대는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천성문 앞에서 가짜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나 온갖 수모를 당하고 천사들에게 쫓겨났던 ‘무지‘한 자가 되지 않고, 믿음의 선조들과 천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승리의 면류관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